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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설] ‘가해자 중심’에서 한발짝도 못 나간 안희정 판결

등록 2018-08-14 18:06수정 2018-08-14 19:02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법원의 무죄판결을 놓고 규탄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법원의 무죄판결을 놓고 규탄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됐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14일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검찰 쪽은 항소 방침을 밝혔다. 기존 ‘업무상 위력’에 대한 판단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이번 판결은 올해 초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터져나온 ‘#미투’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중심’의 법정 문턱이 여전히 높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날 판결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지점이 여럿 있다. 재판부는 피고인과 피해자의 ‘위력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에 있어서 피해자의 내심이나 심리상태가 어땠는지를 떠나 적어도 피고인이 어떤 위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인 위력이 직접 행사된 구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 물적 증거와 정황이 없다며, 일관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것은 입증 몫을 오롯이 피해자에게 미루는 듯한 판단이요, 바로 그 점이 수많은 피해자를 침묵하게 해왔다는 현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감히 ‘아니요’라 말할 수 없는 권력형 성폭력의 본질을 제대로 헤아린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물리적 강제력이 없으면 성폭력이 아니다’라는 식의 인식을 드러낸 것은 재판부가 사회구성원들의 인식 변화 수준은 물론, 최근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강간 기준 판례 흐름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대로 명시적으로 동의 의사를 표하지 않았고 나름의 방식으로 거절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내심으론 반하는 상황이었더라도, 현재 우리 성폭력 범죄의 처벌 체계에선 피고인의 행위가 처벌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죄라 볼 수 없다” “사회에서 사용되는 성폭력 행위의 의미와 형사법에 규정된 성폭력 범죄의 의미가 일치하지 않는다”며 ‘죄형법정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90년대초 서울대 신아무개 교수의 성희롱 사건이 제기됐을 때 ‘이게 범죄면 대부분 범죄자일 것’이라는 비아냥도 컸지만, 법원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는 한발 진전된 성범죄 기준을 확립할 수 있었다. #미투 이후에도 여전히 ‘업무상 위력’ 범위를 좁게 판단한 이번 판결을 두고 “퇴행적” “권력형 성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지은씨의 폭로 이후 논란은 ‘피해자는 피해자스러워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강고한지 확인시켜줬다. 이번 판결이 성폭력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왜 그 자리에서 저항하지 않았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며 피해자들을 고립시키고 좌절시켰던 사회의 고정관념을 자칫 더 강화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하지만 단단한 바위의 틈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번 드러난 모순은 언젠가는 반드시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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