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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3 17:49 수정 : 2005.02.03 17:49

새해로 넘어온 해묵은 과제가 한둘 아니다. 그 중에서도 북한 핵과 국가보안법 문제는 겨레와 나라의 진운에 족쇄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히 풀어야 할 현안이다. 이것을 풀지 않고는 ‘또 한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갈길은 먼데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다.

이 문제를 푸는 데 소용되는 온갖 슬기와 지혜를 한데 모아야 할 때다. 새해 들머리에 장자의 ‘빈배’(虛船)를 떠올려 보는 까닭이다. “배들이 나란히 황하를 건너는데 무심하게 떠가던 빈배 한 척이 다가와 쿵 들이받는다. 비록 속좁은 사람이라도 이 빈배를 향해 화를 내지는 않는다.” 장자는 무릎을 친다. “사람이 자기를 비워 세상을 노닌다면, 누가 감히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이때 장자가 말하는 비움의 대상은 아마도 증오나 적대감, 살기, 불신처럼 나와 남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강화하는 것들이리라.

북한 핵문제에서 ‘빈배’의 해법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먼저 강자인 미국을 보자. 최근에도 북한 지역 위성사진 판독을 통해 핵탄두 탑재 미사일 발사대도 없고, 전투기는 형편없이 낡은 상태인 것 등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상당히 과장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상대는 거의 빈배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북한은 그동안 비핵화 원칙을 확인하며 단계적 해결을 요구해 왔다. 또 자신들의 제도를 시비하지 않으면 우방으로 지낼 수 있다고 밝히기도 한다. 그런데도 미국은 먼저 핵을 포기하라며 막무가내로 적대적이고 비타협적인 강경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이쪽 배에는 적대감을 가득 채운 채 저쪽의 빈배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꼴이다. 이러면 속없는 사람이라도 화를 낼 수밖에 없다. 상대의 화를 돋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이래서는 안 된다. 미국은 자신의 배부터 비워야 한다.

‘빈배’의 전략은 정작 북한 쪽에 절실하다. 선제공격론까지 거론하는 상황에서 생존하는 길은 핵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공격의 명분을 뺏는 것이 최선이다. 핵 보유국은 비핵국에 대해 핵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적 약속에 기대는 것이 안보의 지름길이다. 6자 회담이란 무대를 이런 쪽으로 활용해야 한다. 확연하고도 공세적으로 비핵의 길을 잡는 게 옳다. 빈배의 결단으로, 아무리 속좁은 사람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 때를 놓쳐서도 안 된다.

양쪽이 불신으로 가득 찬 까닭에 중재자로서 우리 정부의 소임이 막중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왕 “전쟁은 안 된다”며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기로 했다면 양쪽의 적대감과 불신 해소에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두 척의 배가 동시에 짐을 비우는 현실적이고 단계적인 처방이 절대 중요하다. 이를 위해 미국, 일본과의 공조뿐만 아니라 남북 사이 밀접한 대화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남북 대화에는 아직 적극성과 정성에서 ‘2%’ 부족하다. 한쪽이 불신하는 한 양자관계는 풀리기 어렵다는 것을 새겨야 한다.

보안법도 내려놓아야 할 때다. 이 법은 이제 허상과 허구·반인권, 그리고 야만적 과거만 가득 실린 흉물일 뿐이다. 한때 역사에서 잠시 제몫을 했으나 이제는 이 법이 뿌리 박아야 할 환경이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한은 합법 정부고 북한은 반국가 단체라는 주장은 시대착오다. 국제 공산주의도 사라진 지 오래다. 언제까지 국민의 생각과 말을 묶어 둘 것인가. ‘사형’의 죄목이 46개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악법을 싣고서 저렇게 좌충우돌 떠다니도록 해서야 문명국이라 할 수 없다. 보안법을 부린 세상이어야 비로소 인권도 문화도 꽃핀다.

비운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한다. 버림으로써 새것이 들어설 여지를 만들고, 새롭게 출발하게 해준다. 텅빈 마음에서 뜻밖에 창조적인 지혜가 샘솟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비움은 매우 적극적인 삶의 태도라고 할 것이다. 적대와 불신, 핵을 비우자. 그곳에 평화가 채워질 것이고, 이 평화는 우호와 번영을 키울 것이다. 보안법을 버리자. 그 빈 자리에 인간에 대한 존엄과 자유로운 영혼이 담길 것이고,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겨레는 더 결속하고 안보는 갈수록 튼튼해질 것이다. 새해에 꼭 빈배가 보고 싶다.


조상기 논설실장 tum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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