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처음 피의자로 검찰에 소환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결국 대법원 청사 앞에서 ‘담벼락 회견’을 강행했다. 검찰로 이동한 그는 기자들이 준비해놓은 포토라인을 무시한 채 곧바로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걸어 들어갔다. 사법농단 사태의 주범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담벼락 회견 방식과 그 내용에서 오만한 태도가 묻어난다.
우선 그가 검찰청사에 마련된 포토라인을 굳이 거부하고 대법원 앞을 회견 장소로 택한 것은 전두환씨의 골목 성명을 연상시킨다. 스스로 “전 인생을 법원에서 근무한 사람으로서 … 법원에 들렀다 가고 싶었다”고 주장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대법원장 출신임을 부각해 검찰을 압박하고 향후 사건을 맡을 법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보겠다는 저의로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그는 회견에서 “모든 책임은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면서도 법적 책임은 철저히 비켜갔다. ‘인사개입·재판개입 없었다’는 종전 주장에 대해 이날도 “변함없는 사실”이라고 다시 한번 주장했다. 검찰 조사에서도 여전히 혐의를 부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6월 자택 앞 놀이터 회견에서 주장한 내용들은 그사이 검찰 수사를 통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재판은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라며 재판개입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일제 강제노역 손해배상 사건만 봐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강제노역 사건 2건이 2013년 7~8월 대법원에 올라왔는데도 기존 판례에 따라 바로 기각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그해 9~10월 청와대로부터 ‘전원합의체로 넘겨 신중히 판단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대로 따랐다. 기존 판결을 번복하기 위해 외교부가 의견서를 낼 수 있도록 대법원 규칙까지 바꿔주었다. 당시 양 대법원장은 주심인 김용덕 대법관에게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신중 검토 주문을 했고, 김 대법관은 재판연구관들에게 번복할 묘수를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결국 대통령 탄핵으로 불발됐으나, 3년 이상 시간을 끄는 사이 소송의 원고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다. 누가 봐도 명백한 재판개입이 아닐 수 없다.
‘특정 성향 법관들에게 불이익을 준 적이 전혀 없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문건’에는 그가 직접 자필 서명을 통해 인사 불이익을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 있다. 이뿐 아니라 이미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45개 혐의에 공범으로 표시돼 있으나, 당시 대법원장이던 그에게는 사실상 ‘주범’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자신이 말한 대로 이 사건이 법원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려면 스스로 법적 책임까지 모두 지겠다는 솔직한 태도가 절실하다. 그것이 법원 전체를 나락으로 빠뜨린 사법농단의 책임을 엄히 단죄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더이상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이라도 갖게 할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