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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아침 햇발] ‘고르디우스 매듭 끊기’의 어려움 / 고명섭

등록 2019-03-07 15:40수정 2019-03-07 19:46

고명섭
논설위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결단을 ‘고르디우스 매듭 끊기’에 비유하는 글을 실었다. 재일동포 명의로 나온 이 글은 김 위원장의 심중을 대변하는 글로 받아들여졌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프리기아의 왕 고르디우스가 아무도 풀 수 없도록 묶어놓은 매듭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단칼에 끊어버렸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라는 고르디우스 매듭을 끊어버림으로써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고 북한을 경제 강국으로 올려세우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예기치 못한 결과는 김 위원장의 ‘심리적 결단’이 ‘현실적 결단’으로 이어지기까지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김 위원장은 북한 핵 개발의 심장부인 영변 핵시설을 통째로 폐기하겠다며 이 조처의 대가로 민생·민수 관련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단계적 해법’을 거부하고, 느닷없이 ‘일괄타결’ 방안을 제시했다. 미국이 정상회담 자리에서 불쑥 이런 제안을 한 것은 협상의 상례를 벗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도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언론과 의회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핵 문제를 적당히 봉합하고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끝없이 쏟아내는 상황에서 북한의 요구를 선뜻 들어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트럼프 전선의 선봉에 선 의회가 따지고 들 게 분명한 합의안에 서명하기보다는 협상을 결렬시키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을 법하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단독회담과 확대회담을 했다고 1일 보도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단독회담과 확대회담을 했다고 1일 보도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의 본성’에 관한 장대한 시에서 원자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을 묘사했다. 고대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대로 원자들이 위에서 아래로 직선으로 떨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툭 튕겨 나가는 이탈 운동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 작은 이탈, 곧 클리나멘이 거대한 자연의 운동을 만들어낸다.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부린 변덕은 말하자면 외교상의 클리나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클리나멘이 없다면 모든 것은 예정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일직선으로 전진하지 않는다. 역사의 진행은 수많은 힘들의 집합적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경쟁 속에 난데없는 변수와 우발적인 사건이 끼어들어 힘의 벡터를 바꾼다. ‘핵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향한 우리의 염원은 이 힘들의 변덕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1945년 8월15일 일제의 갑작스러운 패망 소식을 두고 많은 사람이 ‘도둑같이 온 해방’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로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세주의 재림’을 언급하며 ‘그 때와 날이 마치 밤중의 도둑같이 오리라’고 한 데서 온 말일 것이다. 역사는 하염없이 늘어지고 우회하고 심지어 거꾸로 가기도 하지만, 때로 ‘그날’은 “해산할 여자에게 닥치는 진통”과 같이 불시에 오기도 한다. ‘고르디우스 매듭’을 언급한 <노동신문> 글에는 “앞길이 멀다고 주저앉을 수 없고, 쉬어갈 수도 없으며, 시련과 난관이 막아선다고 하여 돌아서거나 물러설 자리는 더더욱 없는 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김정은 위원장의 심중을 설명하는 말이지만, 북-미 협상의 길잡이 구실을 해온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고 정치적 성공을 바란다면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끊어지는 그날을 향해 남-북-미 모두 힘과 뜻을 모아야 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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