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혜련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 위원장(오른쪽부터)이 29일 오전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고 이한빛 피디 아버지 이용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정부가 올해 마지막 임시국회 최대 쟁점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했다. 법무부가 고용노동부와 중소벤처기업부 등 관련 부처 의견을 취합해 내놓은 사실상 정부·여당의 단일안이다. 정부안을 보면, 법 제정 취지를 아예 무력화하는 내용들을 총망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핵심 조항 대부분이 정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의원들의 발의안보다도 한참을 후퇴했다. 반년 이상 법 제정 논의를 미적거리다 막판에 와서야 이런 ‘누더기 법안’을 내놓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정부는 ‘명확성이 부족하거나 너무 포괄적’이라며 반대해온 재계 주장을 대폭 받아들여 핵심 조항 대부분을 개악했다. 정부안은 50인 미만 사업장의 법 적용을 4년 유예하자는 기존 여당안에서 한발 더 나가 50~100명 사업장의 2년 유예를 추가했다. 전체 사업장의 99%가 50인 미만이고, 중대재해의 85%가 이들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유예 대상을 추가로 확대하면 38명이 사망한 이천 물류창고 화재 같은 대형 참사가 재발해도 당장엔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다.
원청 경영책임자가 하청업체(임대·용역·도급) 사고에 공동 의무를 지는 조항은 완화했고, 고의적 과실에 대한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조항은 아예 삭제했다. 형사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기 때문이라는데, 말단 관리자와 하청업체가 아니라 원청 대기업과 경영책임자의 책임을 묻겠다는 법 제정의 근본 취지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뿐 아니다. 법 적용 기준에 ‘동시에 2명 이상 사망’을 넣었는데, 이러면 혼자 일하다 목숨을 잃은 ‘구의역 김군’이나 ‘태안화력 김용균씨’는 해당되지 않는다. 징벌적 손해배상도 손해액의 ‘최저 5배 이상’(박주민 의원안)에서 ‘최고 5배 이내’로 한정했다. 기업들이 사고 책임을 ‘부담 없는 벌금형’으로 때워온 오랜 관행을 바꾸려면 강도 높은 징벌적 배상이 필요하다는 입법 취지도 외면한 것이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을 만들라고 했더니 거꾸로 ‘보호법’을 만들었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19일째 단식농성을 하며 법 제정을 촉구해온 김용균씨 어머니 등 유족과 정의당, 시민사회가 반발하는 건 당연하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민주당은 뒤늦게 ‘정부안은 맞지만 단일안은 아니다’라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당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중대재해법 제정은 ‘노동 존중 사회’를 내건 문재인 정부의 개혁 의지를 가늠할 시금석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법사위 법안소위는 29일부터 중대재해법 제정안에 대한 본격 심사에 돌입했다. 이번 회기(1월8일) 안에 처리하려면 시간이 얼마 없다. 단지 정부안의 몇몇 조항을 바꾸는 식의 면피용 입법에 그쳐선 안 된다. 빈껍데기에 불과한 정부안은 당장 폐기하고, 법 제정 취지에 부응하는 입법을 서두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