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사퇴 회견문을 읽으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독일 메르켈 키운 건 콜에 대한 ‘배신’이듯
정치에서 배신은 때때로 ‘성공의 밑거름’
‘배신자’ 낙인 찍히고, 대권 ‘잠룡’된 유승민
위기가 곧 기회이듯…어떤 정치드라마 쓸까
정치에서 배신은 때때로 ‘성공의 밑거름’
‘배신자’ 낙인 찍히고, 대권 ‘잠룡’된 유승민
위기가 곧 기회이듯…어떤 정치드라마 쓸까
‘배신자 낙인’은 ‘범죄자 꼬리표’보다 가혹할 때가 많다. 한번 배신자 낙인이 찍히면 웬만해선 그걸 떼어내기 어렵다. ‘두 총알에 맞아 죽는다’는 북한 속담도 있는데, 배신자는 자기편과 상대편 모두에게 죄를 졌으므로 두 편 모두에게서 총알을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뜻이다. 배신은 무조건 나쁘고 추악하며 배신자는 용서하지 말고 응징해야 한다는 게 사회의 통념이니, 배신자로 지목된 이들이 비참한 말로를 피하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일 거다. 하지만 배신도 배신 나름이다. 정치에서 배신은 성공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 사례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지도자다. 단호하면서도 포용적인 그의 리더십을 일컫는 ‘메르켈리즘’, ‘무티 리더십(엄마 리더십)’이란 용어까지 생겨났다. ‘떴다 사라질 반짝 여성 정치인’에 그쳤을 수도 있던 그를 세계적 정치인으로 키운 건 ‘정치적 배신’이었다. 1991년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한 사람은 헬무트 콜 총리였다. 콜은 메르켈의 ‘정치적 대부’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99년 불거진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U)의 정치자금 스캔들로 깨지게 된다. 당시 기민당 부총재이던 메르켈은 콜 총리의 비자금 스캔들이 터지자 가장 먼저 정계 은퇴를 요구했다. 인간적 관계로만 보면 명백한 배신행위였지만 메르켈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콜 저격수’로까지 불렸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기민당 정치인 중에서 비자금 스캔들에 엮이지 않은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깨끗함과 단호함, 정치력을 인정받은 메르켈은 2000년 기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박근혜대통령이 3일 오후 광주광역시 서구 주경기장에서 열린 광주 유니버시아드 개막식에서 선수단 입장을 보고 있다. 박 대통령은 끝내 정의화 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외면했다. 광주/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이정용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된 지난 2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함께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세 사람은 2005년 당대표(박근혜), 사무총장(김무성), 대표 비서실장(유승민)으로 만난 인연이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오히려 유승민이 일생일대 기회를 거머쥔 셈 유승민은 대통령에게 배신자로 찍히더라도 소신을 지키고 명분을 얻는 길을 택했다. 그가 이제 여권의 대선주자로 우뚝 올라섰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게 됐다. 소신을 버리고 대통령과 잘 지내는 실리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원내대표직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렇고 그런 정치인’ 이상이 되긴 어려울 것이다. 정치인에게 이런 중대한 선택의 기회는 늘 찾아오는 게 아니다. 유승민은 자신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꽉 거머쥐었다. 반면 김무성은 유승민에 대한 배신을 감수하면서 대통령과 같이 가는 길을 택했다. 소신과 명분을 버리고 손쉬운 실리의 길을 택했다. 이제 ‘대선주자 김무성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물론 김무성에겐 아직 시간과 기회가 남아 있다. 김무성은 유승민 사퇴를 결의한 의총장으로 향하다 “사람들이 좀 타협도 하고 굽힐 줄 알아야 하는데 자기 고집만 피우고, 똑같아”라고 중얼거렸다. 김무성은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기어나갔다던 중국 한나라 한신의 고사를 곱씹으며 또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 대통령은 유승민의 정치적 재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10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유승민은 19.2%로 여권 대선주자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김무성까지 제쳐버렸다. 야권 지지층의 선택에 힘입은바 크겠지만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도 10.1%의 지지율로 2위에 올라선 걸 보면 대선주자로서 유승민의 잠재력을 무시하긴 어렵게 됐다. 이렇게 되면 박 대통령이 유승민에게 ‘정치적 성공’의 밑돌을 놓아준 것이나 마찬가지니,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너무도 실감나게 다가온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