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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박 대통령, 유승민 응징과 반전…‘배신의 정치’를 허하라

등록 2015-07-10 17:05수정 2015-07-10 17:44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사퇴 회견문을 읽으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사퇴 회견문을 읽으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독일 메르켈 키운 건 콜에 대한 ‘배신’이듯
정치에서 배신은 때때로 ‘성공의 밑거름’
‘배신자’ 낙인 찍히고, 대권 ‘잠룡’된 유승민
위기가 곧 기회이듯…어떤 정치드라마 쓸까
[임석규의 정치빡] 20

‘배신자 낙인’은 ‘범죄자 꼬리표’보다 가혹할 때가 많다. 한번 배신자 낙인이 찍히면 웬만해선 그걸 떼어내기 어렵다. ‘두 총알에 맞아 죽는다’는 북한 속담도 있는데, 배신자는 자기편과 상대편 모두에게 죄를 졌으므로 두 편 모두에게서 총알을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뜻이다. 배신은 무조건 나쁘고 추악하며 배신자는 용서하지 말고 응징해야 한다는 게 사회의 통념이니, 배신자로 지목된 이들이 비참한 말로를 피하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일 거다.

하지만 배신도 배신 나름이다. 정치에서 배신은 성공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 사례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지도자다. 단호하면서도 포용적인 그의 리더십을 일컫는 ‘메르켈리즘’, ‘무티 리더십(엄마 리더십)’이란 용어까지 생겨났다. ‘떴다 사라질 반짝 여성 정치인’에 그쳤을 수도 있던 그를 세계적 정치인으로 키운 건 ‘정치적 배신’이었다. 1991년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한 사람은 헬무트 콜 총리였다. 콜은 메르켈의 ‘정치적 대부’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99년 불거진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U)의 정치자금 스캔들로 깨지게 된다. 당시 기민당 부총재이던 메르켈은 콜 총리의 비자금 스캔들이 터지자 가장 먼저 정계 은퇴를 요구했다. 인간적 관계로만 보면 명백한 배신행위였지만 메르켈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콜 저격수’로까지 불렸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기민당 정치인 중에서 비자금 스캔들에 엮이지 않은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깨끗함과 단호함, 정치력을 인정받은 메르켈은 2000년 기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박근혜대통령이 3일 오후 광주광역시 서구 주경기장에서 열린 광주 유니버시아드 개막식에서 선수단 입장을 보고 있다. 박 대통령은 끝내 정의화 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외면했다. 광주/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이정용
박근혜대통령이 3일 오후 광주광역시 서구 주경기장에서 열린 광주 유니버시아드 개막식에서 선수단 입장을 보고 있다. 박 대통령은 끝내 정의화 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외면했다. 광주/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이정용

유승민 ‘청와대 얼라’ 발언이 박 대통령 응징의 서막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의원의 이마에 ‘배신자’란 선명한 주홍글씨를 써붙여 기어코 여당 원내대표직에서 쫓아냈다. 대구를 지역구로 둔 유승민에게 박 대통령이 꾹꾹 눌러 쓴 배신자 글씨는 ‘정치적 생매장’의 징표나 다름없다. 박 대통령 처지에서 보면 유승민을 배신자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박 대통령은 2월 9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수가 부족하니까 국민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 정치 쪽에서 국민에게 할 수 있는 소리냐?”라며 정치권의 ‘증세론’을 강한 어조로 질타했다. 증세 주장을 ‘링거 주사를 맞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도 비판했다. 그런데 유승민은 4월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치받았다. 그의 연설은 ‘신보수 노선’으로 각광받으며 크게 회자됐다. 복지 확충은 박 대통령의 대표적 대선 공약이다. 유승민 말대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가 맞다면 박 대통령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셈이다. 박 대통령이 유승민에게 배신감을 곱씹은 결정적 계기는 ‘청와대 얼라’ 발언이란 분석도 있다. 유승민은 지난해 10월 외교부 국정감사에서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청와대 비서진 3인방을 ‘청와대 얼라들(어린 아이들을 지칭하는 경상도 방언)’이라고 지칭했다. 당시 그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그럼 내가 얼라들이랑 일을 한다는 거냐”며 굉장히 진노했다고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전했다.

‘목을 치고 사약을 전달하는 악역’을 유승민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김무성 대표에게 떠맡긴 것도 참으로 비정한 장면이었다. 김무성은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유승민을 배신한 셈이 됐다. ‘여당의 비박 투톱’으로서 청와대에 대립각을 세우며 같은 길을 걸어온 유승민을 찍어내는 데 앞장섰는데 그걸 어떻게 배신이 아니라고 우길 수 있겠는가. 김무성이 ‘원내대표직 사퇴 총의’를 담은 의원총회 결론을 유승민에게 전달하면서 “우리가 어쩌다 이래 됐노”라고 한탄하며 포옹한 것도 유승민을 배신한 데 대한 멋쩍음의 표시였을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원조친박’이었다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유승민과 김무성을 연달아 배신자로 만들어버리는 묘수를 발휘한 셈이 됐다.

이 대목에서 김무성의 ‘자발적 배신’까지 박 대통령의 사주로 보는 건 무리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유승민이 사퇴하는 전후 과정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청와대 기획’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처음엔 새누리당 의원들 사이에서 ‘유승민 사퇴’에 반대하는 의견이 훨씬 우세했다. 이 때문에 ‘친박’들도 초반엔 의총을 통한 세력대결을 피하려 애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유승민 사퇴 불가피’ 쪽으로 여당 의원들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윤상현, 김재원 의원이 의원들과 접촉해 유승민 사퇴의 당위성을 설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의 공식 직함이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 그러니까 박 대통령의 정무특보다. 두 사람의 얘기는 곧 대통령의 뜻으로 의원들에게 전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의원들이 심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무성이 6일 유승민과 만나 ‘자발적 사퇴 불가’ 의사를 확인하고 맨 처음 만나 상의한 인물도 김재원이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승민 쫓아내기 프로젝트’의 이면에서 ‘윤상현-김재원 대통령 정무특보 라인’의 정무 기획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배신자를 가장 혹독하게 응징하는 집단은 조폭일 것이다. 의리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치가 강조해야 할 최상의 가치가 국민과의 의리라면 몰라도 정치인끼리의 의리는 아닐 거다. 정치에서 배신과 소신이 부딪힐 때 정치인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정치적 의리를 지키자니 소신이 울고, 소신을 지키자니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될 테니 어찌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큰 정치인과 작은 정치인, 좋은 정치인과 별 볼 일 없는 정치인은 바로 이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길을 간다.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된 지난 2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함께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세 사람은 2005년 당대표(박근혜), 사무총장(김무성), 대표 비서실장(유승민)으로 만난 인연이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된 지난 2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함께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세 사람은 2005년 당대표(박근혜), 사무총장(김무성), 대표 비서실장(유승민)으로 만난 인연이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배신자’들 타격 준 대통령 묘수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유승민이 일생일대 기회를 거머쥔 셈

유승민은 대통령에게 배신자로 찍히더라도 소신을 지키고 명분을 얻는 길을 택했다. 그가 이제 여권의 대선주자로 우뚝 올라섰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게 됐다. 소신을 버리고 대통령과 잘 지내는 실리의 길을 선택했더라면 원내대표직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렇고 그런 정치인’ 이상이 되긴 어려울 것이다. 정치인에게 이런 중대한 선택의 기회는 늘 찾아오는 게 아니다. 유승민은 자신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꽉 거머쥐었다. 반면 김무성은 유승민에 대한 배신을 감수하면서 대통령과 같이 가는 길을 택했다. 소신과 명분을 버리고 손쉬운 실리의 길을 택했다. 이제 ‘대선주자 김무성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물론 김무성에겐 아직 시간과 기회가 남아 있다. 김무성은 유승민 사퇴를 결의한 의총장으로 향하다 “사람들이 좀 타협도 하고 굽힐 줄 알아야 하는데 자기 고집만 피우고, 똑같아”라고 중얼거렸다. 김무성은 시정잡배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기어나갔다던 중국 한나라 한신의 고사를 곱씹으며 또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 대통령은 유승민의 정치적 재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10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유승민은 19.2%로 여권 대선주자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김무성까지 제쳐버렸다. 야권 지지층의 선택에 힘입은바 크겠지만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도 10.1%의 지지율로 2위에 올라선 걸 보면 대선주자로서 유승민의 잠재력을 무시하긴 어렵게 됐다. 이렇게 되면 박 대통령이 유승민에게 ‘정치적 성공’의 밑돌을 놓아준 것이나 마찬가지니, 정치는 생물이란 말이 너무도 실감나게 다가온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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