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이정현 신임 대표가 환호하는 청중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9일 새누리당 사령탑으로 선출된 이정현 신임 대표는 지난 4월 총선에서 호남 지역구 재선에 성공한 데 이어 ‘보수정당 최초의 호남 대표’로 선출되는 진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호남 출신으로 1984년 민정당에 입당한 지 32년 만이다.
전남 곡성 출신인 이 대표는 동국대 4학년 때인 1984년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구용상 전 민정당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됐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광주시장을 지낸 구 전 의원에게 “정치 똑바로 하라”고 적었다. 이를 계기로 구 전 의원의 비서관에 발탁된 그는 호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민정당 사무처 당직자로 입당했다. 이 대표는 “호남 출신으로 겪은 설움을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첫 공직 출마는 1995년 광주시의원 선거였다. 선거자금이 없었다. 당에서 가불한 퇴직금 2천만원을 들고 신한국당 후보로 뛰었지만 낙선했다. 12% 득표. 낙선 뒤 그는 당에서 전략분석·홍보통으로 자리매김했다. 9년 뒤 총선에서 다시 광주 서구의 문을 두드렸으나, 대선 ‘차떼기’와 탄핵 역풍에 그가 얻은 표는 720표(1.03%)였다. 혹독한 실패였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만난 것도 이때였다. 당시 박근혜 대표는 선거운동 중인 이 대표에게 두번 전화해 “어려운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냐. 선거 뒤 밥을 사겠다”고 격려했고, 실제로 선거 한달 뒤 여의도에서 만났다. “박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해 주십시오’라며 길게 설명을 드렸더니 박 대표가 ‘어쩜 그리 말씀을 잘하세요’ 하면서 수첩에 적더군요.”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 이튿날 그는 당 수석부대변인으로 임명됐다. 그때부터 그는 박 대통령의 그림자였다. 2007년엔 박근혜 대선 경선 캠프의 특보와 대변인을 지냈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패한 뒤엔 직함 없는 평의원 박근혜의 ‘대변인 격’을 했다. 친이명박계의 ‘친박 학살 공천’ 속에서도 이 대표는 박 대통령 추천 몫으로 비례대표 22번을 얻어 금배지를 달았다. 2012년에는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의 공보단장을 거쳐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을 지냈다. ‘박근혜의 입’, ‘박근혜의 복심’이 그 앞에 붙는 수식어였다.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인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는 <한국방송>의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전화해 보도 통제에 나섰던 통화 녹취록이 지난 6월말 전국언론노동조합에 의해 공개돼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 대표는 2014년 7·30 전남 순천·곡성 보궐선거에 출마해 재선(비례대표 포함) 의원이 되면서 정치인으로서 한층 뛰어올랐다. 호남에서 18년 만에 보수여당 후보로 당선된 그는 지역주의 타파의 주인공으로 단숨에 주목받았다. 이어 2년 뒤인 지난 4·13 총선에서 전남 순천에서 다시 지역주의 벽을 허물고 3선 고지에 올랐다. 총선 때부터 당 대표를 목표로 삼은 그는 ‘강성 친박’과 거리를 두고 ‘머슴 리더십’을 내세워 전당대회에 출마해 약속을 이뤄냈다.
이 대표는 당선 뒤 기자회견에서 “지금까지 봐왔던 당청 관계와는 확연히 다를 것”이라며 “국회 70년 총정리 국민위원회를 만들어 국회개혁에도 나서겠다”고 말했다. 또 “내년 대선에 대비해 대선후보를 외부에서 모셔오고 내부 분들도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영입 개방뿐 아니라 그분들이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작업을 바로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 곡성 출생(1958) △광주 살레시오고, 동국대 정외과 △18~20대 의원(3선) △당 최고위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비서실 정무팀장 △청와대 정무수석, 홍보수석.
성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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