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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박근혜 방패막이’ 이정현…‘보스’에 매달린 30년 정치인생

등록 2016-10-01 09:45수정 2016-10-01 10:05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정세균 국회의장 사퇴를 촉구하며 나흘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29일 오전 국회 대표실에서 김성태 의원의 말을 듣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정세균 국회의장 사퇴를 촉구하며 나흘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29일 오전 국회 대표실에서 김성태 의원의 말을 듣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이정현 입체분석
사상 초유 단식투쟁 나선 여당 대표

처음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이 문제였다. 국회가 통과시킨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수용을 지난 25일 박 대통령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해임건의안 처리를 “다수 야당의 횡포”라고 비난했지만, 자신들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임동원 통일부 장관과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에 대한 해임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한 바 있다. 당시 청와대는 국회의 뜻을 존중했다. 관행조차 무시하는 박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이 비판받을 차례였다. 이때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느닷없이 등장했다. 그는 지난 26일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단식 투쟁에 들어가는 한편, 여당의 국정감사 불참을 결정했다. 박 대통령에게 쏠리는 비판의 화살은 과녁을 잃었다. 그러나 정국은 뒤죽박죽됐다. 여당 내부도 오락가락 좌표를 잃고, 자중지란에 빠졌다. 이 대표가 초래한 결과다. 당 사무처 말단에서 집권당 대표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정치인 이 대표가 꿈꾼 정치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다수의 관찰자들은 “결과를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자기 철학이 빈곤한 이 대표의 한계에서 비롯된 참사”라고 진단한다. 그가 전당대회 때 약속한 혁신의 길로 돌아올 수 있을까. 단식 나흘째인 지난 29일 오전 이 대표가 국회 대표실에 앉아 눈을 감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글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성실성과 충성심, 딱 거기서 멈춰버린 정치인 이정현

문을 3분의 1쯤 빼꼼히 열어 놓았다. 문틈으로 매트 위에 반쯤 누운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안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밖에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밀실 단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조처로 보였다. 단식 4일째인 지난 29일 오전 11시, 이 대표는 홀로 있었다. 옆에는 성경책과 국회 관련 당 보고서가 펼쳐진 채 놓여 있다. 작은 탁자 위에는 생수 두병이 얹혀 있었다.

“빨리 단식을 풀어야죠? 몸도 시간이 갈수록 상할 텐데요”라고 말을 건넸다. 이 대표의 목소리에 기운이 많이 떨어져 있었지만, 정세균 국회의장 때문에 단식을 할 수밖에 없다는 등 자기 논리를 펼칠 때는 말이 빨라지고 톤이 올라갔다. 그다웠다. 하지만 입술은 쉬 말랐고, 말할 때마다 혀에 낀 하얀 백태가 보였다. “난 진짜 물밖에 마시지 않아요. 처음 하는 단식인데 아주 힘드네요.”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단식농성 닷새째를 맞은 30일 오전 국회 대표실에서 불을 꺼놓은 채 잠들어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단식농성 닷새째를 맞은 30일 오전 국회 대표실에서 불을 꺼놓은 채 잠들어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그러나 그의 고통과 아픔은 육체적, 물리적인 성질에 국한되는 것 같지 않다. 이번 파동으로 입은 정치적인 상처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당장 사상 초유의 여당 대표 단식 및 국정감사 중단이라는 중대 결정은 며칠 되지도 않아 파탄 지경에 처했다. 당 바깥의 보수진영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성급한 결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김영우 국방위원장은 동료들의 만류에도 국정감사 참여를 선언했다. 이 대표는 지난 28일 고육지책으로 당 소속 의원들에게 국정감사를 정상화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 대표의 ‘결단’은 의원총회에서 무시당했다. “정치를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서청원 의원)라는 훈시를 공개적으로 받기까지 했다. 당 대표 체면이 말이 아니다.

독자 출마 뒤 친박 힘으로 대표 당선

지난 8월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호남 지역구에서 두번이나 당선된 최초의 여당 의원이라는 후광이 그를 떠받쳤다. 현직 대통령의 비서 출신이라는 중대한 결격 사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남 출신 여당 대표론’을 앞세워 당 대표 선거에 도전하고 나섰다. 친박계의 대표주자가 아니라 독자 후보였다. 선거 운동 초반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에 <한국방송>(KBS)의 보도국장(김시곤)에게 세월호와 관련한 축소 보도를 압박했던 사실이 다시 불거졌지만, 그는 중도 하차 하기는커녕 돌진했다. 정치적 상황도 그의 편이었다. 친박 주류가 애초에 민 최경환, 서청원 의원이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리면서 차례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범주류에 속하는 이주영 의원이 주류 쪽 대표주자로 유력해 보였지만, 그는 친박과의 차별화와 구애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지지율이 뜨지 않았다. 친박계는 결국 비주류 단일후보(주호영)에 맞서기 위해 막판에 이정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물론 권역별 정견 발표회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연설 등으로 당원 및 대의원들의 그에 대한 지지가 높았던 것은 주류의 선택을 끌어낸 요인이 됐다.

혁신을 내건 그는 대표 취임 초반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아침에 열리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참석자들의 모두 발언을 없애고 결과만 발표하는 식으로 회의 방식을 바꿨다. 또 전기료 누진체계를 개편하기 위해 소집한 당정회의에는 산업통상자원부 실무 관계자를 불러서 머리를 맞댔다. 집무실의 집기도 화려한 것을 빼라고 지시했다. 격식 파괴, 실질 숭상의 모습이었다.

여당 대표 초유의 단식 농성
설득력 없어 당내 반발 거세
국감 복귀 독자 ‘결단’ 했으나
강성친박 거부로 리더십 상처

대표 취임 일성부터 ‘당정일체’
“대통령과 맞서는 걸 정의라 하면
여당의원 자격 없어” 일갈
우병우 두둔 등 대통령 감싸기 일관

의원 만들어준 박대통령은
그에겐 “귀인”이자 정치적 은인
박근혜 어록 책으로 펴내는 등
보스 모시는 자세 남달라

하지만 두달이 채 안 돼 이정현 대표의 리더십은 벼랑 끝에 섰다. 여당 대표의 단식 돌입부터 느닷없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상정한 과정을 문제삼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빌미로 단식 투쟁에 나서고 국감을 중단한 것은 누가 봐도 과잉 대응이었다. 이강윤 폴리뉴스 논설위원은 <와이티엔>(YTN)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정 의장에게 항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이 대표의 단식은) 모기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꺼내 든 격”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의 단식 결정은 주변과도 전혀 상의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감 거부 중단 요청도 마찬가지였다. 이 대표는 단식 및 국감 중단 사흘째인 2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정세균 의장 규탄대회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게 나와 새누리당의 소신”이라며 소속 의원들의 국감 복귀를 요청했다. 바로 직전 의원총회에서 국감을 거부하는 단일대오를 유지한다는 결론을 낸 뒤에 내놓은 회군 요청이었다. 이 역시 원내대표나 최고위원들과 협의하지 않고 불쑥 내놓은 카드다. 그날 저녁 긴급 의총에서 이 대표의 요청이 보란듯이 거부됐다.

온몸으로 대통령 비난 화살 받은 격

새누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국민들 보기에 창피해서 낯을 들지 못하겠다.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며 “전당대회에서 이 대표가 뽑힐 때부터 우려했던 결과가 일찍 나타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대표가 섬기는 리더십을 내세우지만, 그가 섬기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라며 “이번에도 박 대통령을 보호하려다가 과도한 행동을 해서 일어난 참사”라고 덧붙였다. 오랫동안 당 사무처에서 일했던 한 인사도 “이 대표는 열정과 성실함에서는 따를 사람이 없지만 그의 주파수는 항상 국민이 아니라 보스를 향하고 있다”며 “이 대표가 자기 자신부터 혁신하지 않으면 본인이나 당이나 정권이나 다 망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단식 투쟁은 실제로 박 대통령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이득을 안겨줬다. 대통령이 국회의 다수 의사(김재수 장관 해임 건의)를 무시한 데 대한 비판이 쏟아질 판에 국민의 관심은 이 대표와 정 국회의장의 갈등에 쏠렸다. 대통령에게 가는 화살을 이 대표가 몸으로 막은 형국이다. 또 미르재단과 케이(K)스포츠재단을 둘러싼 의혹도 여당 대표의 갑작스런 투쟁 때문에 이슈 순위에서 다소 밀렸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28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28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이 대표는 당 대표로서의 첫 일성부터가 ‘청와대 보호령’이었다. 전당대회 다음날인 지난 8월10일 축하난을 가지고 온 김재원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대통령과 맞서고 정부와 맞서는 것이 마치 정의이고 그게 다인 것처럼 인식을 갖고 있다면 여당 소속 의원으로서 자격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의 생각은 다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전의 당 대표들이 ‘청와대에 할 말은 하는 대표’를 천명하거나 ‘수평적 당청관계’를 강조하던 것과 180도 다른 태도였다. 전당대회 때는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와 관련해 “정부 여당 모두에 큰 심적 부담”이라며 우회적이나마 자진 사퇴를 촉구했지만, 대표가 된 뒤에는 “진상 규명 결과를 봐야 한다”며 태도가 달라졌다. 이런 그를 위해 박 대통령은 당선 축하 오찬 때 진귀한 송로버섯과 상어 지느러미 요리를 내놓았다. 또 전임 김무성 대표 때는 5분에 그쳤던 오찬 뒤 독대 시간을 25분으로 늘렸다.

“잊지 않겠다”는 박근혜의 약속

이 대표와 박 대통령의 이러한 ‘특수관계’의 출발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정현(이하 직함 생략)이 17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을에 출마했을 때였다.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후보로 광주에서 출마한 이는 그가 유일했다. 당시 박근혜 대표는 이정현에게 격려 전화를 두차례 했고, 선거 뒤 약속대로 위로 점심을 샀다. 그 자리에서 이정현은 ‘한나라당이 호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15분 동안 열변을 토했다. 표정이 굳은 당 5역들과 달리 박근혜는 수첩에 메모를 해가면서 “어쩌면 말을 그렇게 잘하세요”라고 말했다. 그 직후 이정현은 수석부대변인에 발탁됐으며, 이때부터 ‘박근혜 사람’이 됐다.

호남 지역구에서 두번이나 연속으로 당선된 뒤 여세를 몰아 집권여당 대표 자리에도 올랐으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정치인 이정현’이 아니라 ‘박근혜의 복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8월11일 새누리당 신임지도부-청와대 오찬에서 이정현 대표가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호남 지역구에서 두번이나 연속으로 당선된 뒤 여세를 몰아 집권여당 대표 자리에도 올랐으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정치인 이정현’이 아니라 ‘박근혜의 복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8월11일 새누리당 신임지도부-청와대 오찬에서 이정현 대표가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가 ‘박근혜 복심’이라는 특수 지위에 오른 것은 2007년 당내 경선이 끝난 이후부터다. 이명박이 경선에서 이긴 뒤 이명박 캠프에서는 이정현에게 당 선대위 홍보부본부장을 제의했지만, 그는 박근혜를 모셔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 뒤에는 경기지사 김문수가 그에게 정무부지사 자리를 제안했다. 그는 역시 같은 이유로 사양했다. 이를 전해 들은 박근혜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가시지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대표님(박근혜)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서부터는 한나라당이라고 써진 파란 점퍼를 입고 서울 시내를 활보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당당하고 이렇게 떳떳하고 이렇게 행복한 정치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표님이 저한테 다른 데로 가라고 하시면, 저 깨끗이 정치판을 떠나겠습니다.” 이정현이 당시 했다는 이 말은 만일 정치윤리 교과서가 있다면 베스트 답안이 될 것이다. 감동받은 박근혜는 “제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실제로 박근혜는 그를 챙겼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이계한테 친박계가 공천 학살을 당할 때였다. 박근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이명박한테 거세게 맞섰고, 비례대표 후보 선정에서 이정현만큼은 당선 안정권으로 여겨지던 22번에 배치했다. 이로써 이정현은 꿈에도 그리던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그는 “박근혜 전 대표 같은 귀인을 만나”, “그분이 배려해준 덕분”에 국회의원이 됐다고 말했다(<진심이면 통합니다-이정현의 자서전적 에세이>. 2011년). 지난 8월 전당대회에서도 그는 “모두가 근본 없는 놈이라고 등 뒤에서 저를 비웃을 때 저 같은 사람을 발탁해준 박근혜 대통령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수도권에서 밀려서 호남 출마, ‘대박’

그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해준 은인을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대했는지는 의원회관 사무실 배치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애초 그는 박근혜 의원실(545호) 맞은편을 원했으나, 선수에서 다른 의원한테 밀리자 바로 아래층(445호)을 선택했다. 또 자신이 2004년 합류한 이후의 박근혜 어록을 “혼자 보기 너무 아깝다”며 2008년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그는 ‘대변인 격’이라는 우리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한 직함으로, 대선주자 박근혜를 모셨다. 일부에서 호가호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박근혜가 2011년 “내가 하지 않은 이야기를 그가 밖에서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그를 두둔한 이후로는 이정현의 말은 곧 박근혜의 말로 받아들여졌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당선된 뒤 이정현이 정권인수위 비서실 정무팀장을 거쳐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으로 일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6월 그가 홍보수석을 느닷없이 그만두고 청와대에서 나온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여권 일각에서는 그가 경질됐다는 분석이 나왔으며, 권력 다툼에서 밀렸다는 얘기도 돌았다. 어쨌든 청와대에서 나온 그는 처음에는 7·30 재보궐선거 때 서울 동작을 지역구 출마를 노리는 듯했다. 하지만 수도권에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출마하면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가 된다는 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그는 고향인 순천·곡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밀려서 내린 결정이 그에게는 전화위복이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 타고 다니는 나홀로 유세와 예산 폭탄을 퍼붓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호남의 여당인 민주당 후보를 꺾었다. 광주·전남에서 처음으로 지역구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되는 대기록을 세웠다. 단숨에 전국적인 유명인물로 떠올랐다.

열살때 합동유세 본 뒤 의원 꿈꿔
고교때는 웅변학원에 등록
“정치 똑바로 하라” 편지 보내
의원 비서로 채용돼 정치입문

이회창 총재 시절부터 두각
총재 말씀자료 등 정리 잘해
2004년 총선 광주 출마 계기
‘박근혜의 입’으로 발탁돼

‘서번트 리더십’ 내세워 대표 당선
“섬기는 대상은 박근혜뿐” 평가
수십년 몸에 밴 ‘충성 정치’ 벗어나
정치발전 기여할지는 그의 몫

국회의원은 이정현이 초등학교 3학년인 열살 때부터 꾼 필생의 꿈이었다.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국회의원 합동유세를 본 게 계기였다. 검정 지프차를 타고 온 검정 양복을 입은 후보들이 ‘도로포장을 해주겠다’,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하는 “멋진” 말이 어린 그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때부터 연설은 그의 취미가 됐다. 수시로 동네 뒷산이나 저수지 둑에 올라 큰 소리로 연설을 연습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부친이 웅변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오기도 했다.

고등학교(광주 살레시오) 때의 일이다. 첫 시간 자기소개 때 목소리가 많이 떨렸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대로는 국회의원의 꿈이 요원해진다는 생각에서 시내 웅변학원에 바로 등록했다. 목에 피가 나오도록 악을 쓰고 연습을 했다. 당시에 말 잘하기로 유명했던 국회의원 이도선의 연설 테이프도 구해 들었다. 한달 뒤 전국 고교 웅변대회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대학도 정치인이 되는 지름길로 여겨졌던 육군사관학교를 처음에 응시했으나, 시력이 나빠 떨어졌다. 이듬해 입학한 대학(동국대 정치외교학과)에서도 그는 과 친구들을 데리고 각 정당을 찾아 토론을 신청하는 등 국회의원 꿈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때 민정당(민자당 및 한나라당의 전신)의 김중위, 평화민주당의 신순범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그런 자세론 출세 못해” 호통에 정신 번쩍

그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대학 졸업 전인 1985년이었다. 당시 자신의 고향에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구용상에게 ‘정치 똑바로 하라’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를 보낸 것이 계기였다. 5·18 당시 광주시장이었던 구용상은 군부의 강경진압에 반대했으며, 이로 인해 시장에서 면직됐다. 젊은이의 기개를 높이 산 그는 이정현을 만나 자신의 비서로 채용했다. 구용상은 매사에 깐깐했던 모양이다. 한번은 대정부질문을 하기 위해 이정현에게 연설문을 준비시켰다. 수십일 동안 수십번을 고치고 다듬어서 연설 전날 최종 마무리를 한 이정현은 구용상의 집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구용상은 연설 당일 새벽 5시에 이정현을 깨워 글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고칠 게 토씨 정도라는 것을 안 이정현은 “의원님, 이제 그만 좀 하세요”라며 버럭 짜증을 냈다. 구용상은 움찔하기는커녕 되레 원고를 집어던지면서 “너는 인마! 출세하기 틀렸어 인마! 다른 사람이 100번을 고치면 너는 한번 더 읽어보고 101번을 다듬을 생각을 해야지, 너 같은 정신자세를 가진 놈은 출세 못 해 인마!”라고 소리쳤다. 이정현은 “천둥 같은 불호령 소리에도 놀랐지만, 의원의 꾸지람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고 회상했다. 이정현이 두고두고 구용상에게 고마워하는 대목이다. 보통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 구용상을 끝까지 모시는 그에게 주변에서는 다들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구용상은 소선거구제로 바뀐 13대 선거(1988년)에서 떨어진 뒤 민정당 사무부총장에 발탁됐다. 이정현은 구용상을 따라 정당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구용상이 당을 떠난 뒤 그는 철저하게 홀로 서야 했다. 영남당에서 호남 출신에다가 공채 출신도 아닌 그는, 자신의 말대로 흙수저보다도 못한 ‘무수저’ 신세였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그는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휴일에도 빠짐없이 사무실에 나왔다. 대변인실 말단 간사 시절부터 그는 신문을 꼼꼼히 읽고 자신만의 스크랩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게 큰 자산이 됐다. 당직자건 기자건 지난 정치적 사건이나 주요 정치인의 발언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면 이정현을 찾았다. 요즘으로 치면 ‘인간 구글’이었던 셈이다.

이정현은 1995년 지방자치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됐을 때 광주 시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이 역시 국회의원으로 가는 철저한 준비였다. 그는 지난해 ‘지방자치연구소’에서 한 특강에서 “가만히 따져보니 당내에서 비례대표를 하기가 너무 힘들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고시 합격하고 장차관 지낸 사람,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줄을 서울역에서부터 세우면 저는 수원쯤이나 가서야 차례가 돌아오려나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차별화를 해야겠구나 결심했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우리 당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호남 출마였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사무총장인 김덕룡을 만나 광주 지역에 출마할 테니 떨어지고 난 뒤에 다시 사무처 복귀를 허용해달라고 요청했다. 남들이 꺼리는 험지 출마를 하겠다는 기특한 젊은 당료에게 당에서는 출마 비용을 전액 보조해주는 등 적극 지원했다.

물론 시의원 한번 출마했다고 그의 처지가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생의 꿈을 이루는 과정이 막막해 보였던 것은 여전했을 터였다. 그러니 수원쯤 서 있던 그를 앞으로 끌어당겨 국회의원 티켓을 쥐여준 사람에 대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정현은 18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 종반까지 비례대표 당선 예상 번호가 20번 정도로 나오자, 비 오는 거리를 걸으면서 “하나님, 정현이 좀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엉엉 울었다. 막판에 22번까지 당선이 확정됐고, 그는 40여년 만에 꿈을 이뤘다.

이정현이 국회의원으로 가는 과정에 섬긴 보스로는 박근혜 이전에 이회창이 있었다. 1998년 이회창이 당 총재로 복귀한 직후부터 그는 당 사람에서 ‘이회창 사람’으로 정치적 신분이 바뀌었다. 이정현의 성실성과 열정, 축적된 현안 지식 등을 눈여겨본 총재실에서 그를 보좌팀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2002년 대선 때까지 정세분석국 부국장, 전략기획팀장 등을 맡아서 이회창을 위해 일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략통으로 불렸다. 매일 아침에 3장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총재 등 주요 당직자에게 올렸다. 그는 이 보고서 인기가 높아서 주요 당직자들이 서로 달라고 했다고 자주 말했다. 그러나 당시 당 사정을 잘 아는 여권의 한 관계자는 “직함은 여러 가지로 바뀌었지만, 그가 이회창 총재를 위해 하는 일은 거의 같았다. 언론 보도를 분석해서 주로 최고위원회의 등 매일 아침 열리는 회의 때 총재와 사무총장 등이 발언할 내용을 정리해서 준비하는 일이었다. 무슨 대단한 전략 문서가 아니라 현안 대응 문건이었다”고 말했다.

‘언론인 성향 분석 보고서’ 음습한 추억

이 시절 그는 정치 인생에 있어 상당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2000년 12월 언론대책 공작문건인 ‘향후 주요업무 추진계획-10대 핵심과제 중심’이라는 제목의 문건이 언론에 폭로됐다. 여기에는 언론을 적대적·우호적으로 가르고, 언론사 논설 집필진의 성향을 파악해서 관리하는 내용이 적시돼 있었다. 또 우호적인 언론그룹을 조직화하는 한편 적대적인 집필진에 대해서는 비리 등 자료를 축적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문건의 작성자는 당시 정세분석국 부국장이던 이정현으로 밝혀졌다. 이정현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당직 사표를 냈지만, 얼마 안 지나 오히려 국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이정현은 20여년간 당 사무처에서 일하면서도 기획조정국, 조직국, 홍보국 등 큰 국실을 책임지고 일해 본 경험이 없다.

그때도 주군에 대한 충성심 역시 대단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여권의 한 관계자는 “밥 먹는 자리에서도 누가 이회창 총재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얘기를 하면 금방 밥상을 뒤엎을 기세로 상대를 반박하는 등 이 총재를 옹호했다”고 말했다.

이정현 대표는 새누리당 정세분석국 부국장으로 일하던 2000년 12월, 언론대책 공작문건인 ‘향후 주요업무 추진계획-10대 핵심과제 중심’의 작성자로 밝혀져 정치 인생에 위기를 겪기도 했다. 지난 28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발언하는 이 대표.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이정현 대표는 새누리당 정세분석국 부국장으로 일하던 2000년 12월, 언론대책 공작문건인 ‘향후 주요업무 추진계획-10대 핵심과제 중심’의 작성자로 밝혀져 정치 인생에 위기를 겪기도 했다. 지난 28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발언하는 이 대표.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이정현의 정치적 경력은 화려하다. 첫번째 의원 배지를 달고 청와대 실세가 된 것은 보스 덕분이었지만, 지역주의 벽을 두번씩이나 깨트리고 집권여당의 대표 자리에 오른 것은 본인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제 화려한 경력에 걸맞은 정치적 업적, 즉 ‘이정현 정치’를 선보일 수 있을까. 그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새누리당 한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 눈치보기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기에 독자적 판단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혹평했다. 한 전직 여당 의원은 “이 대표는 일 잘하고 운이 좋은 정치 기능인이지 지도자로서의 비전을 갖춘 정치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 사무처에서 일한 한 인사는 “자기 공간을 열어가는 정치적 창의성이 부족하고, 기본적으로 정치 철학이나 가치에 대한 고민이 없기에 좋은 정치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좋은 정치에 대한 생각만큼은 이 대표도 분명하다. 그는 “삼권분립은 우리 현실 정치에서는 장식품이고 무늬에 불과하다”며 “국회를 청와대와 정부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은 항상 여당 지도부”(자신의 블로그)라고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해법으로는 당 대표 제도 폐지 등 중앙당 축소와 원내 중심 정당화를 든 뒤 “국회의원 스스로 3권분립의 한 축인 입법부의 일원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핵심은 실천이다. 보스에게만 충성한 정치인으로 남을지 정치 발전을 이룩한 지도자로 기록될지는 이정현 대표의 선택에 달린 셈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 이정현(58) 새누리당 대표는 정치적 자산이 누구보다 풍부하다. 비주류의 한계를 넘은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사무처 말단 직원 때부터 오직 성실성과 근면, 열정, 실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호남 지역구에서 두번이나 연속으로 당선된 뒤 여세를 몰아 집권여당 대표 자리에도 올랐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화려한 정치 경력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정치인 이정현’이 아니라 ‘박근혜의 복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느닷없는 단식과 국정감사 보이콧도 박 대통령을 위한 정치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가 ‘청와대 하수인’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서, 역사에 책임지는 자기 정치를 펼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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