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2일 오전 춘추관에서 황교안 국무총리 후임으로 국민대 김병준 교수를 내정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벽에 박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수습한다며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새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표하기까지 야당은 물론 집권여당인 새누리당도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국회와 일언반구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에 야당은 분노했고 여당은 당혹해했다. 청와대가 말로는 “정치권이 요구하는 거국중립내각 취지를 살렸다”면서도 행동은 여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내팽개친 것이다.
청와대가 내각 인선을 발표한 이날 오전 9시30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는 당 지도부와 3선 이상 중진 의원 12명이 모여 사태 수습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정현 지도체제의 거취를 놓고 비박근혜계 의원들과 이 대표 등 친박계 의원들이 날카롭게 설전을 벌이던 참이었다. 언쟁을 이어가다가 정병국 의원은 총리 발표 언론 보도를 보고 이 대표에게 “대표님은 총리 내정 소식을 사전에 아셨나요”라고 물었다. 다른 참석자들도 이 소식을 그 순간 처음 들었는지 놀라는 분위기였다. 이 대표는 “그건 뭐…, 나중에 말씀드리겠다”며 답을 피했다. 이때 이 대표는 보좌진에게서 개각 명단이 담긴 쪽지를 건네받았고, 이를 정 의원에게 보여줬다. 사실상 이 대표도 그제야 알았다고 시인한 것이다. 정 의원은 “여기서 백날 떠들어봐야 소용없는 것 아닌가. 대통령에게 진언을 하고 중지를 모으려고 하는데 이런 상황이면 회의가 의미없다”고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대표와 함께 새누리당 ‘투톱’인 정진석 원내대표도 회의 뒤 기자들에게 “나도 여기 와서 알았다”고 말했다. 정 원내대표는 회의 뒤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강석호 최고위원, 주호영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곤혹스러움을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와 정 원내대표는 지난 주말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김병준 교수와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고 한다. 하지만 청와대는 주요 인선 발표 직전에나마 여당 지도부에 귀띔해주던 전례마저 무시한 채 ‘김병준 총리 내정’을 덜컥 발표해버렸다.
야권 역시 기습적인 개각 소식에 당황하고 분노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야당 지도부는 오전 9시20분께 ‘엠바고’(보도 유예)를 건 청와대발 개각 명단이 여의도 정치권에 뿌려지고 나서야 김병준 교수가 총리 후보자에 지명된 사실을 알게 됐다. 민주당 지도부는 갑자기 전해진 소식에 대응하느라 오전 9시30분에 예정됐던 의원총회를 연기했다. 공식 발표가 나기 전, 민주당 의총장에서 대기하던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게 사실이냐”, “그냥 정보지가 아니냐”는 설왕설래가 오가기도 했다. 윤관석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박 대통령이 10% 안팎의 지지를 받는 상태에서 국정을 운영하려면 야당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던진 인사여서 (대통령이) 앞으로도 국정운영을 움켜쥐고 놓지 않겠다는 취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를 당의 차기 비대위원장 물망에 올리고 있던 국민의당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애초 안철수 전 대표까지 나서서 김 교수를 영입하는 데 공을 들인 국민의당은 지난달 26일 수락 답변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김 교수가 2~3일 전 ‘총리 제의 통보를 받았다’고 알려왔다고 한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총리 통보를 받았다’는 얘기는 들었고 본인이 안 한다고 할 수 있어 (기다렸는데) ‘고민해보겠다’고 하는 언론 보도를 보고 본인에게 확인할 필요 없이 ‘하는구나’ 했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오늘 아침에 황교안 총리를 만났고, 정진석 원내대표와 30~40분 얘기할 기회를 가졌는데 이분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경미 엄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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