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춘 자유한국당 혁신위원장이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혁신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위원장 류석춘)가 2일 당의 혁신 방향을 ‘신보수주의’로 정한 혁신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의 정체성으로 “1948년 건국”이라는 뉴라이트식 역사관을 강조하거나, ‘촛불’로 상징되는 광장 민주주의를 “다수의 폭정”이라고 빗대는 등 퇴행적 사고와 대통령 탄핵 과정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을 그대로 노출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반면 대통령 탄핵을 부른 국정농단 사태와 친박근혜계의 패권적 행태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나 언급은 단 한 줄도 담지 않았다. 그런데도 혁신선언문 내용에 반발해 일부 혁신위원이 사퇴하는 등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혁신 구상에 대한 당 안팎의 기대치가 점점 낮아지는 분위기다.
혁신위는 이날 오전 9시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류석춘 위원장과 이옥남 혁신위 대변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혁신선언문을 발표했다. 혁신위는 우선 당의 현주소를 두고 “지난 10년간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이은 자유한국당은 집권여당으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와 역할을 망각하고, 권력 획득과 유지라는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했다”, “이에 20대 총선 공천 실패, 대통령 탄핵과 대선 패배라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직시하고 자기 혁신에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혁신위는 당의 현재 상황이 “계파정치라는 구태”, “무사안일과 정치적 타락” 때문이라며 강도 높은 어조로 비판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이나 총선 패배를 부른 ‘진박 공천’의 당사자인 친박계 행태나 청산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특히 혁신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선 “철저한 혁신을 통한 보수우파 세력 통합과 정권 재창출”을 강조하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출발점을 “1948년 건국”으로 삼았다. 당의 정체성을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부른 뉴라이트식 역사관으로 무장하겠다는 것인데, 이승만연구원 원장 등 뉴라이트로 활동한 류석춘 위원장의 주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혁신위는 혁신의 방향을 ‘신보수주의’라고 밝혔다. 앞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신보수주의 이념으로 당을 새롭게 만들겠다”고 말한 바 있다. 혁신위는 신보수주의가 “정의와 형평을 바탕으로 양극화와 불공정한 기득권을 타파하고 활기차며 따뜻한 공동체의 지속적 발전을 추구”, “부자에게는 자유를 주고 서민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국민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나라”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948년 건국과 성공의 역사에 대한 긍정적 역사관 △광장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제 민주주의 △산업화 세대의 기득권은 물론 강성귀족노조 등 민주화 세대의 기득권도 배격하는 서민중심경제 △다문화가족 포용과 북한 개방·자유화 등 글로벌 대한민국을 강조했다.
특히 정당정치가 이미 대의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데도, 자유한국당 혁신위가 굳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혁신선언문에 담은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부른 촛불집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혁신위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의 원리가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 실현돼야 한다고 믿는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광장 민주주의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의 위험을 막고, 다수의 폭정에 따른 개인 자유의 침해를 방지하며, 시민적 덕성의 함양을 통해 더불어 사는 공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주장했다.
혁신위는 “이러한 신보수주의 이념에 기초한 혁신을 통해 가치 중심 정당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면서도, 당 안팎에서 최우선 과제로 요구하는 인적 쇄신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인적 혁신과 인재영입 또한 이뤄야 한다”는 어정쩡한 말로 갈음했다.
혁신위는 “이번 혁신에 대한민국의 존립이 걸렸다”고 주장했지만, 그나마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는 선언문 일부 내용에 반발한 혁신위원이 사퇴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그간 선언문 채택 과정에서 내부 갈등을 빚었던 ‘서민중심경제’라는 표현이 최종적으로 선언문에 포함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혁신위원인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은 이날 오전 취재기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자유한국당이 서민중심경제를 지향한다는 것은 헌법적 가치 중 하나인 시장경제에 반하는 것으로 용납할 수 없다. 헌법과 자유한국당 강령·당헌의 기본적 가치가 부정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사퇴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혁신위는 “‘서민중심경제’는 헌법적 가치인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약자나 소외계층을 보듬는 의미로 사용됐다. 이는 보수우파 혹은 자유민주진영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전통적 가치 중의 하나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 위원의 일방적 사퇴에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김남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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