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 사진은 고 김 전 총리가 1971년 당시 박정희 공화당 총재(오른쪽)로부터 부총재 임명장을 받는 모습. 연합뉴스
한국 정치의 ‘풍운아’이자 현대사의 중심에 있던 김종필(92)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별세했다. 5·16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켰고, 지역주의와 보스·계파 정치를 통해 1990년대 ‘3김 시대’를 풍미한 주역이다. ‘영원한 2인자’로 늘 권력의 둘째 줄에 머물렀지만, 한국 정치사의 주요 국면이 그의 ‘선택’에 따라 요동쳤다.
김 전 총리는 23일 아침 8시15분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장례는 그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오는 27일 발인 뒤 청구동 자택과 모교인 충남 공주고에서 노제를 지내고 고향인 부여군 외산면에 마련된 가족묘원에 안장된다. 유족은 아들 진씨와 딸 예리씨 등 1남1녀가 있다.
그의 정치인생은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이라는 꼬리표가 보여주듯 권력을 향한 강한 의지와 좌절로 점철됐고, 산업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대일 굴욕외교의 당사자이자 지역주의·계파주의를 이용한 정치로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육군사관학교(8기) 출신 엘리트 군인이던 김 전 총리가 한국 현대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가 35살이던 1961년이다.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그는 육사 8기 동기들과 함께 5·16 쿠데타에 나섰고, 6개 항으로 이뤄진 ‘혁명공약’도 집필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초대 중앙정보부장, 민주공화당 창당 주도 및 초대 의장 취임, 4년6개월의 국무총리 재임 등 ‘2인자’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했다. ‘쿠데타 정권’의 지속을 위해 그가 창립한 중정은 인권탄압과 공작정치, 정보정치로 정치의 ‘암흑기’를 이끌었다.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불거진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및 파친코 사건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의 주역으로, 또 ‘대일 굴욕외교’의 주범으로 국민들의 분노를 사면서 두차례에 걸친 “자의 반 타의 반” 외유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중정부장이던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의 회담에서 작성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현재까지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발목을 잡고 있다. ‘김-오히라 메모’에는 일본의 강제침탈에 대한 사과·배상 등은 빠진 채 청구권 자금과 차관 규모가 적시되어 있다. 일본의 강제징용과 징병, 일본군 ‘위안부’ 강제 모집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정과 사과 등을 받지 못한 채, 일본에서 자금을 들여오는 데만 집중했다. 일본 정부가 현재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 등에 대한 공식 사과를 거부하는 이유다. 이 메모는 1965년 6월 조인된 ‘한-일 협정’의 토대가 됐고, ‘밀실합의’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당시 일본에서 들여온 자금으로 ‘산업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김종필 증언록>에서 “오늘날 어느 선진국 못지않은 자유민주주의, 그 바탕이 된 세계 경제 10위권의 경제력은 한-일 교섭에서 장만한 밑천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또 “자유나 민주주의는 그걸 누릴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것”이라고 밝혔다. 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린 이병철 삼성 회장 등 “어려움에 처한 경제인들의 사면”을 건의하고,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건의한 이가 본인이라고 밝혔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끝나고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그는 잠시 시련을 겪었다.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재산을 압류당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당시 유력한 정치 지도자였던 김 전 총리를 비롯해 김영삼, 김대중 등이 정권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전두환 신군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당시 노태우 사령관에게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 △있는 성의를 다해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하라 등 ‘2인자 이론’을 설파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재기에 나섰고, 같은 해 대선에 뛰어들었지만 낙선했다. 대선에서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이른바 ‘3김’은 쪼개졌지만,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등을 얻으며 정치 기반을 확보했다. 영남과 호남 그리고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정당체제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충청권 표심을 바탕으로 김 전 총리는 늘 조정 역할을 했다. ‘킹’이 아닌 ‘킹 메이커’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그는 1990년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키며 여당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도와 여당 대표까지 올랐지만, 내부 갈등 끝에 탈당해 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그의 야당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한 이른바 ‘디제이피(DJP) 연합’을 발표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국민의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맡았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과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김대중 대통령과 갈등했다. 2001년 9월 자민련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반대하며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가결하면서 디제이피 연합은 무너졌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과 디제이피 연합을 꼽았다. 한-일 수교로 근대화 성장의 밑천이 마련됐고,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역사적 화해가 첫발을 내디뎠다고 설명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그의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2004년 노 대통령 탄핵에 동참했다가 역풍을 맞아,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10선 도전에 실패했고, 자민련은 지역구 4석만을 얻었다. 결국 그는 “오늘로 총재직을 내놓고 정계를 떠나겠다”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은 변했다”며 “노병은 죽지는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2007년 이명박 대선 후보나 2012년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등 간접적인 정치 활동에만 나섰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김 전 총리는 항상 강자 편에 섰다”며 “부드러운 리더십 등 개인적인 측면에서 평가받을 부분도 있지만, 군사독재 기여나 지역감정 유발 등은 지양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공작정치의 기원이 박정희 정부에서 시작됐으며 김종필 전 총리도 그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총리의 별세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애도가 이어졌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긴 고인의 손때와 족적은 쉬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며 “시와 서, 화를 즐겼던 고인은 걸걸한 웃음으로 각박하고 살벌한 정치의 이면에 여백과 멋이라는 거름을 주었다”고 조의를 표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고인의 정치 역경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살아가는 후대에게 미뤄두더라도, 고인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고, 자유한국당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경제발전을 통해 10대 경제대국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고 평가했다. 정의당은 “오래된 역사의 물줄기는 저만치 흘러가고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완전히 자리잡았다”고 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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