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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5 15:53 수정 : 2020.01.15 16:21

[한겨레21]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 1호 최혜영 강동대 교수 인터뷰

표창원이 떠나고 최혜영이 왔다. 4년을 건너 ‘인재영입 1호’라는 타이틀을 얻은 두 사람이다. 이미 불출마를 선언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국회 진보 성향의 50대 남성을 상징했다. 최혜영 강동대 교수(사회복지)는 장애를 가진 40대 여성의 삶을 대표할 것이다. 1월7일 최 교수가 10년째 센터장으로 있는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를 찾아 인터뷰했다.

최혜영 강동대 교수. 류우종 기자

배려와 동행 중에서

유치원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이 정계 입문을 결심한 계기가 됐다고 했다.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끝나면 여야의 격돌이 예상된다.

‘민식이법’(어린이 교통사고 가해자 처벌 강화 등을 담은 법안)처럼 유치원3법도 당사자 처지에선 법안 통과가 안 되는 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예전에는 답답하기만 했는데 요즘은 이게 현실정치인가 싶다.

첫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인터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최 교수는 “인터뷰하면서 내 장애를 물어볼 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이라면서 조심하던데, 그냥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궁금한 것을 물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얼핏 예의를 차리는 말 속에 배제와 차별의 시선이 의도치 않게 섞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최 교수가 보기에 이런 일은 일상에서 흔하다. 1월1일 민주당 신년행사 얘기를 꺼냈다.

“여의도 당사에서 단배식(신년행사)을 마치고 (서울) 동작구에 있는 현충원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현충원 참배에 이어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가야 하는 일정이 빠듯했다. 한 당직자가 현충원 일정부터는 힘들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했다. 일종의 배려인 셈이었다. 그때 한 다선 의원이 나서서 그렇게 하지 말자, 힘들어도 같이 가자고 했다. 장애인들은 어떤 상황을 원할까?”

정치에서 일정과 동선은 메시지다. 이날 최 교수는 현충원 참배에 이어 봉하마을 방문까지 모든 일정을 함께 소화했다. 최 교수는 “민주당 사람들이 현충원 계단을 걸어 오르는 대신 나와 함께 경사로로 이동하는 순간 ‘아, 내가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에 뭉클했다”고 했다.

장애 차별은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들린다.

10년 전 휠체어를 탈 때 불편한 몸으로 왜 나왔느냐는 말을 직접 듣기도 했다. 요즘은 그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은 없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은 맞다.

단체활동으로 그런 변화한 성과를 얻은 경험도 있을 법한데.

우리 센터는 인식개선 교육을 하는 곳이다. 갈 길이 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보려고 거리로 나서고 고용노동부·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를 돌고 돌았지만, 거기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차별을 시정하고 제도로 보완하는 것은 결국 국회가 입법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국회에서.

시행착오 없이 사회에 복귀하도록

최 교수는 “2018년부터 시행된 직장 내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 들어간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의무조항이 (단체활동으로 이뤄낸) 지난 10년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했다. 이 법에 따르면 1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직장에선 장애인 근로자 채용이 확대되도록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해야 한다. 이어 최 교수는 “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면서 ‘아, 이래서 정치를 하는구나, 당사자들이 먼저 나서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국회에 들어가면 이제 장애 인식 교육이 필요 없을 만큼 인식의 전환을 가지고 올 법과 제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똑 부러지게 본인이 하고 싶은 정치를 얘기하지만 원래 자기 삶에서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15년 전 교통사고로 척수장애를 얻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사회에 복귀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금방일 줄 알았다. 그런데 5년이 흘렀다. “북유럽처럼 장애인과 관련된 복지체계가 잘된 곳은 복귀까지 보통 반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보다 열 배 걸린 셈”이라며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 같은 시행착오 없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본인의 삶과 정치가 맞닿아 있는 느낌이다.

민주당에서 정치를 해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마침 엄마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되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병원에 가서 검진받는 장면 하나하나까지 모두 절망의 연속이었다. ‘부모가 모두 장애가 있는데 왜 굳이 아이까지 (낳으려 하냐)’라는 시선을 받으며 병원 문을 들어섰지만, 현실에서는 진료받으려고 해도 올라가기 불가능한 산부인과 진료대, 휠체어가 들어가기도 버거운 초음파 검사실, 휠체어에 맞게 높낮이가 조절되지 않아 몇 사람이 도와줘야 겨우 찍을 수 있는 엑스레이가 놓여 있다. 사소해 보이는 이런 장벽 하나가 일반의 시각에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우리는 그 벽이 너무 높고 단단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많은 이가 포기한다. 나처럼 장애를 가진 여성도 엄마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만드는 게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알려진 대로 그는 무용수였다. 기억나는 순간을 물었다. “나는 주연은 아니었다”고 했다.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 여러 마리의 군무가 펼쳐질 때 그 무리의 리더를 맡았다. 창작발레 <콩쥐팥쥐>에서도 콩쥐·팥쥐가 아니라 콩쥐가 난관을 헤치도록 돕는 조력자였다. 발레단에서 동료· 후배를 돕고 가르치고, 그러다가 스물다섯 살 때 교통사고가 났다. 5년 만에 사회에 복귀했을 때 토슈즈를 신는 대신 휠체어에 앉았다.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그런 그가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됐다.

“걷는 것 말고는 다 잘할 자신이 있다”

지난 연말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 국면에서 여야가 충돌했다. 현실정치로 들어가면 만만치 않을 텐데.

지인이 건넨 걱정 중에 정치판은 험하다,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있다. 그런 걱정도 편견이다. 그런 말 자체가 정치 참여를 어렵게 한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감성팔이’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 누군가가 굳이 그런 말을 전달하면서 오히려 그걸 공론화하고 깎아내리려 했다. 그래서 말했다. 감성팔이라도 괜찮다, 일할 수 있다면, 그래서 결과를 손에 쥘 수 있다면.

최 교수는 요즘 “국민이 허락해주신다면” 휠체어를 탄 채 가뿐하게 아이를 안고 국회의사당에 들어서는 자기 모습을 상상한다. “걷는 것 말고는 다 잘할 자신이 있다”면서 웃는다. “나를 보면서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밤 10시가 다 돼 최 교수로부터 문자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 “예민한 내용이 있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영입된 인물들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관련해 구설에 오른 것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여의도 정치의 문법을 배워가고 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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