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수 신임 민주노총위원장(가운데)이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 단식 돌입 기자회견에서 단식을 시작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안이 너무 허술해서 기가 막힌다.”
“정부안은 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법의 실효성을 완전히 빼버린, 껍데기만 남은 안이다.”(고 이한빛 피디(PD) 아버지 이용관씨)
정부가 책임 범위와 적용 대상을 대폭 축소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스무날 가까이 곡기를 끊고 법 제정을 촉구해온 산업재해 희생자 유가족들은 분노했다. 김미숙씨는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의당 의원총회 참석해 “정부라는 곳이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오히려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 정말 한심스럽다. 우리나라 수십 년 동안 이런 죽음이 계속 있었고 이제 막자고 하는데 정부에서 또 죽이겠다고 한다”고 개탄했다. 정부안에 반발한 쪽은 유족들이나 정의당뿐만이 아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대표로 한 법학계 인사 92명은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제정안의 법적 쟁점에 관한 법학계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현재 정부안대로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 불렸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논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과연 정부의 중대재해법안은 무엇이 문제일까.
‘사망자 2명 이상’으로 중대재해를 정의하면 ‘구의역’도 처벌 못해
먼저, 중대재해의 ‘정의’부터 문제다. 정부는 중대재해법 적용기준을 ‘사망자 1명 이상’ 또는 ‘동일한 원인으로 또는 동시에 2명 이상 사망’으로 검토하고 있다. 최종안이 후자로 결론날 경우 혼자 일하다 숨진 태안화력의 고 김용균씨,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작업을 하다 숨진 김군씨 사례가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생긴다. 김미숙씨가 “용균이는 혼자 일했고, 많은 죽음이 거의 혼자 일하다가 일어난다. 혼자 일하다 벌어지는 재해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죽음을 막지 못한다”고 우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정부는 급성중독 사고는 ‘5명 이상 동시’에 피해자가 있을 때 중대재해로 규정하는 안도 제시했다. 이렇게 된다면 동시사고가 아니었던 지난 2016년 삼성과 엘지 사외하청 노동자들의 메탄올 중독 사고(6명 이상) 등 사례는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26일 현재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올해 산업재해 사망자 신고 건수는 모두 751건으로, 이 가운데 1명이 사망한 경우는 전체의 93.74%(659명)를 차지한다. 2명 사망은 18건(2.56%), 3명 이상 사망은 6건(0.85%)이다.
38명 숨진 이천 화재 참사도 처벌 유예 가능성
정부는 법 적용 유예 대상 사업장도 대폭 늘렸다. 본래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법 적용을 4년 유예하자는 부칙을 담았는데, 정부는 더 나아가 ‘50인 이상~100명 미만 사업장’은 2년 유예하자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중대재해의 85%가 일어나는데 이런 사업장에 적용을 4년 유예하는 것도 모자라 50~99인 사업장도 2년 유예를 가져왔다”며 “원청책임도 약화, 처벌도 완화, 징벌적 손해배상도 약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자고 했더니 중대재해기업‘보호’법을 가져온 셈”이라고 비판했다.
정부안이 입법되면, 3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 같은 사례가 2년 내에 다시 발생했을 때 중대재해법의 적용을 피할 가능성이 생긴다. 당시 시공사였던 (주)건우는 임직원이 62명인 중소기업으로, 50인이상 100인 미만 기업이다. 정부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법 적용을 4년 유예한다’는 부칙 존립도 주장하고 있다. 이 경우 지적장애인으로 재활용업체에서 일하던 김재순(26)씨가 지난 5월 파쇄기에 끼여 숨졌던 사례는 4년 간 중대재해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김씨가 일했던 회사는 13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영세사업장이었다.
임대한 크레인에서 사고 나도 책임자 처벌 안돼
정부는 사업주나 법인, 기관이 제3자한테 임대·용역을 준 경우 안전 보건 책임을 지게 하는 부분을 두고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사업주 등이 ‘시설, 설비 등을 소유하거나 그 장소를 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경우’에만 한해 처벌하도록 단서조항을 두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임대·용역 계약에서 중대재해법 적용 기준을 좁히는 것을 두고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건설현장에서 기계를 임대해와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임대를 이유로 원청이 처벌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타워크레인 등 건설기계 임대 세 가지만 원청책임을 인정한다. 정부안은 산안법 기준보다 좁다. 덤프, 지게차, 굴삭기 임대 등은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는 또한 “발주만으로 안건보건조치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과잉이므로 발주는 제외”하자고 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 의견대로라면, 앞으로 발주처가 무리한 공기 단축 등 안전 의무를 위반하고 그로 인해 중대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묻기 어려워 보인다. 중대재해법을 발의한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는 이날 이천 화재 참사의 주요 원인이 ‘발주처의 공기 단축 지시’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정부는 또한 중대재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경영책임자의 정의에서 ‘이사’를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이사’에 한정하자고 했다. “이사에는 사외이사 등 법인의 경영을 주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으므로 안전보건을 담당하는 이사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안전·보건 조치 의무가 있는 경영책임자 등 범위를 시설·설비의 ‘소유자’는 빼고 시설·장비·장소 등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한테만 의무를 부과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정부안이 통과될 경우엔 시설·설비를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한테는 중대재해의 책임을 묻기가 어려워진다. 경영 책임자한테 엄중한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실질적 안전 조치를 하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중대재해를 예방하자는 법안의 취지에 반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안건보건관리 책임자를 두도록 한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은미 원내대표는 “경영책임자 의무에서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 시 산업재해 예방’에 관한 규정을 삭제한 것은 그나마 있는 위험의 외주화 조항을 삭제한 것으로 원청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조차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안은 또한 인과관계 추정 조항도 아예 삭제됐다. 공무원 처벌조항도 ‘형법상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법학자들은 이날 국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안전범죄에서는 기업이 여러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결과를 초래한 직접적인 행위보다 그 구조적인 배경을 제공한 행위가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기업의 안전범죄 등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인과관계 추정 조항은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환경범죄 관련 법률에서 ‘상당한 개연성’을 전제로 인과관계 추정 조항을 두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날 민주노총은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정부안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고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정부는 사고 이전 5년 간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이 안전·보건 조치 의무를 위반한 사실이 3차례 이상 확인된 경우 1억원 이상 20억원 이하 벌금을, 사업주나 경영책임자 등이 사고 관련 증거를 인멸하거나 현장을 훼손하는 등 사고 원인 규명, 진상조사, 수사 등을 방해 또는 이를 지시, 방조한 경우 5억원 이상 30억원 이하 벌금을 내도록 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양벌 규정에서 매출액 또는 전년도 수입액의 10분의 1 벌금을 가중한다는 내용은 삭제됐다. 수천억에서 수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한테 20억원 정도 벌금형으로 처벌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매출액과 수입액에 따른 벌금이 무거워야 기업이 산재 예방에 행동을 나선다는 것이다.
노지원 박준용 정환봉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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