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살아온 길-
‘영부인’으로 국정참여…최태민과 잘못된 만남
‘18년 칩거’ 울분·배신감으로 이분법적 세계관
보수정당 위기 때 등장해 ‘선거의 여왕’ 등극
최순실과 헌정 문란…탄핵심판으로 권력 박탈
‘영부인’으로 국정참여…최태민과 잘못된 만남
‘18년 칩거’ 울분·배신감으로 이분법적 세계관
보수정당 위기 때 등장해 ‘선거의 여왕’ 등극
최순실과 헌정 문란…탄핵심판으로 권력 박탈
34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의 딸은, 이후 4년 만에 ‘파면된 대통령’의 신분으로 청와대를 떠나게 됐다. 2017년 3월10일 오전,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탄핵 인용”을 선고하면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부녀 대통령, 민주화 이후 최초로 과반 지지율(51.6%)를 얻은 대통령의 영광은 국민에게 쫓겨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에 가려지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의 65년 삶은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관통한다. 1974년 8월 피살된 육영수씨 장례식 엿새 뒤 가슴에 상장을 달고 ‘퍼스트레이디’로 데뷔한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되며 보수의 신화로 자리매김해왔다. 박 전 대통령을 향한 일방적인 ‘동경’과 ‘환멸’ 모두 박 전 대통령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재료로 활용됐다. 박 전 대통령의 퇴진이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박정희 신화’의 종말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년 11월10일 일기)고 다짐한 이후,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영부인’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근원인 최태민(1912~1994)씨를 만난 것은 1975년 3월이다. 최태민씨가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서 근혜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편지를 세차례 보냈고, 이후 최씨와 그 일가는 박 전 대통령의 주변을 에워쌌다. 수천억원대로 추산되는 최씨 일가의 재산은 박 전 대통령과 함께 한 ‘구국봉사단’과 육영재단 운영 개입 등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직후인 1979년 11월21일 두 동생(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를 떠나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 8월 신기수 전 경남기업 회장이 마련해준 성북동 집으로 옮겼다가 1990년 현재의 삼성동 집에 입주했다. 삼성동 사저의 계약 주체는 최태민씨의 부인이자 최순실씨의 어머니인 임선이씨로 알려졌다.
18년 동안 ‘칩거’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마음은 울분과 배신감으로 채워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이루셨던 일을 폄하하고 무참히 깎아내리는 것도 모자라 무덤 속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인신공격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사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않은 충격이었다”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박 전 대통령이 주변 인사를 판단하던 ‘배신’과 ‘의리’의 이분법은 이 당시 형성됐다.
정치권의 잇딴 러브콜을 마다하던 박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하고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했다. 이 후보의 패배 뒤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군에 출마해 당선됐다. 정호성·이재만·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 채용된 것도 이 무렵이다.
박 전 대통령은 초선의원 3년차이던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2002년 미래한국연합을 창당해 9개월 동안 ‘외도’한 것을 제외하고, 박 전 대통령은 언제나 보수정당의 중심에 서있었다. 정치인으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적이 없는 그가 화려하게 정치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산업화 세대의 박정희 향수, 대구·경북(TK)를 기반으로 한 지역감정, 강력한 반공 정서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지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구원투수’로 당의 중심에 섰다. 당 대표로 선출된 그는 정당 역사상 유례없는 ‘천막당사’를 발판으로 ‘50석도 어려울 것’이라던 총선에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때까지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을 상대로 ‘40 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2006년 5월20일,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 11㎝가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병상에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이 이후를 “덤으로 얻은 제2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 대표로서 성과를 발판으로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지만 패했다. “경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선언하며 차기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양쪽의 갈등은 고조했다. 특히 2008년 4월 총선 당시 김무성 의원 등 친박근혜계 인사들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자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이명박-박근혜의 갈등은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정치 입문 이후 처음으로 반대연설까지하며 부결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었고 충청권의 민심도 얻을 수 있었다.
‘여당 내 야당’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얻은 그는 2011년 12월, 당의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된다. 한나라당은 앞서 8월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무산과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어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붕괴되자, 박 전 대통령은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당의 전면에 등장했다.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외부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외연확장을 모색했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상징색 역시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완전히 바꿨다. 당헌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추가했다. 한나라당과 ‘다른’ 세력이라는 이미지 형성에 성공하면서, 2012년 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어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다.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의 ‘난제’는 역설적이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김재원 전 새누리당 의원)의 말처럼, 박 전 대통령은 유신, 인혁당 사법살인 등 ‘아버지 문제’에 있어서만은 명쾌한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박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서도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대목은 “아버지 시절에는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에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족한 면도 있었다”는 부분이 유일하다.
‘100% 대한민국’을 외치며 대통합을 내세운 박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박정희식 국가주의의 부활, ‘배신의 트라우마’에 따른 공조직 불신, 공포·공작정치로 일관했고, 결국 국민들의 분노에 밀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대통령으로 남게됐다.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박근혜는 1974년 피살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6년 5월 20일 오후 서울 신촌 현대 백화점 앞에서 거리유세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갑작스런 괴한의 공격에 얼굴을 다쳤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29일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를 마치고 돌아서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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