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노동당 중앙위 8기3차 전원회이 사흘째인 17일 자신의 서명이 기재된 서류를 들어보이고, 간부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서류는 이날 회의에서 인민생활 안정을 위해 발령됐다는 김 총비서의 '특별명령서'로 추정된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지난 15~18일 나흘간 열린 ‘노동당 중앙위 8기3차 전원회의’에서 친필 서명한 “특별명령서”를 발령하고, “혁명 앞에 가로놓인 현 난국을 반드시 헤칠 것”이라고 당중앙위를 대표해 “엄숙히 선서”했다. 그러곤 “뼈를 깎고 살을 저미면서 인민의 생명과 생활을 책임”지라고 전원회의 참가자들한테 거듭 주문했다.
김정은 총비서가 유엔·미국의 고강도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변이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조중 국경 폐쇄 장기화가 겹친 북한의 현재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식량난 등 경제난 완화와 ‘인민의 신뢰’ 확보 등에 노심초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17일 발령된 “특별명령서”는 “인민 생활 안정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려는 충심”에 따른 것이라고 <노동신문>은 전했다. 19일 통일부는 “경제·민생 관련 최고지도자 ‘특별명령서’ 발령은 이례적”이라고 짚었고,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전시예비물자를 인민들한테 공급하라는 ‘특별명령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실제 김 총비서는 회의 첫날인 15일 “현재 인민들의 식량 형편이 긴장해(어려워)지고 있다”며, “농사를 잘 짓는 것”을 “당과 국가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전투적 과업”으로 규정하고 “농사 총집중”을 호소했다. 북한은 평소에도 식량이 부족한데 지난해에는 여름 수해로 “작황이 평년보다 20만~30만t 줄었다”(이인영 통일부 장관)는 게 정부 판단이다.
김 총비서가 “인민 생활 안정”과 “농사 총집중”을 거듭 강조한 배경엔 “비상방역 상황의 장기화”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김 총비서는 “비상방역상황의 장기화는 국가비상방역사업에서의 강한 규율 준수 기풍의 장기화”라고 규정했다. 지난해 1월 말 이후 1년5개월째인 국경 폐쇄 조처가 이른 시일 안에 풀리지 않으리라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앞서 북녘의 최대 명절인 ‘태양절’(4월15일, 김일성 주석 생일 기념일) 즈음에 조중 국경 개방을 염두에 둔듯한 움직임이 분주했으나, 5월초부터 변이 바이러스 확산 등에 강한 경계감을 드러내는 기사가 <노동신문>에 자주 실리더니 국경 개방 기대도 쏙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회의 마지막 날인 18일 김 총비서의 “현 난국을 반드시 헤칠 것”이라는 ‘선서’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에 따른 고강도 제재의 지속, 국경 폐쇄 장기화, 식량난 등 이른바 ‘3중고’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인민들의 불만을 달래고 신뢰를 확보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인민생활 안정·향상”(다섯째 의제)과 “육아정책 개선·강화”(여섯째 의제)가 처음으로 당중앙위 전원회의 공식 의제로 다뤄진 까닭이다.
다만 김 총비서가 “백절불굴의 혁명정신”과 “자력갱생·간고분투”를 강조하며, 당 간부들한테 “뼈를 깎고 살을 저미면서” ‘위민헌신’하라고 주문한 사실은 역설적으로 “인민생활 안정·향상”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할 정책 수단이 제한돼 있음을 방증한다. 당중앙위 전원회의 역사상 처음으로 “당중앙지도기관 (구)성원들의 당조직사상생활 총화(결산)”를 공식 의제로 다룬 건, 전사회적 “반사회주의·비사회주의 투쟁 강화” 주문과 함께 ‘내부 통제 강화’ 흐름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민생활 안정·향상”에 집중하겠다는 김 총비서의 정책 기조는, 안정적인 외부 환경의 필요에 따라 상대적으로 온건한 대외정책 기조로 나타난 듯하다. 김 총비서는 “대미관계에서 견지할 전략전술적 대응과 활동 방향”을 회의 셋째날 밝혔는데,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 완료 발표(4월30일) 이후 약 50일 만의 공식 반응이자 북한도 대응 방향이 정립됐음을 시사한다”고 통일부는 풀이했다.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준비돼 있어야 한다”는 김 총비서의 주문은 그 자체로 방향을 드러내지 않지만 “201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이후 김 총비서가 직접 ‘대화’를 비중있게 언급한 첫 사례“라고 통일부는 짚었다.
아울러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해나가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문은 돌발 변수가 없다면 당분간은 북쪽이 핵시험·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와 같은 전략적 군사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관측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유리환 외부적 환경을 주동적으로 마련”하겠다는 김 총비서의 언급은, 2018년 평창겨울철올림픽 특사단 방남과 풍계리 핵시험장 폐쇄 등 남북·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진 “주동적 실천 조처들”을 가리키는 북쪽의 표현이다. <노동신문>이 전한 김 총비서의 “국제정세” 관련 언급에 대미 비난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주목할만하다.
성김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운데 회색 양복)가 19일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미 정상회담(5월21일)과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로 드러난 남북미 정상의 정책 기조가 이른 시일 안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할 ‘외교와 협상’으로 이어질지는 전망하기 쉽지 않다는 게 정부 안팎의 대체적 의견이다. 두 가지 중요 외교 일정이 바람의 방향을 읽을 첫 가늠자가 될 수 있다. 첫째, 성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의 방한이다. 성김 대표가 23일까지 서울에 머물며 한·미 및 한·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 협의(21일) 등의 계기에 어떤 ‘대북 신호’를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둘째, 다음달 11일 ‘조·중 우호, 협력 및 호상원조 조약’ 60돌 및 20년 만의 조약 갱신 계기에 북-중 고위급 의사소통·교류가 이뤄질지, 어떤 ‘조중 협력 및 대남·대미 정책’이 발신되느냐도 주목 대상이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