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음악가 리준무(71)씨
미 우륵관현악단 리준무씨
32년전 뉴욕에 악단 꾸려 연주
남북 가곡 듣는 무대 갈증 느껴
북한예술단 초청 합동공연 하고
직접 방북해 수차례 연주회 열어
104회째 공연은 스승추모 음악회
32년전 뉴욕에 악단 꾸려 연주
남북 가곡 듣는 무대 갈증 느껴
북한예술단 초청 합동공연 하고
직접 방북해 수차례 연주회 열어
104회째 공연은 스승추모 음악회
재미동포 음악가 리준무(71·사진)씨는 29살 때인 1971년 미국에 왔다. 간호사인 아내가 미국 병원에 취업이 돼 함께 왔다.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그는 처음엔 음악 공부를 하고 싶었다. 아이가 생겼다. 생계를 꾸리며 공부를 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등 닥치는 대로 여러 일을 했다. 10년이란 세월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사람들을 음악으로 감동시키겠다는 오래된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1981년 서울대 음대 출신들로 동호인 악단을 구성했다. ‘뉴욕서울교향악단’이다. 서울대 교수들을 1년에 한차례 정도씩 지휘자로 모셔 간헐적으로 향수를 달래던 이 악단은 1989년 리씨가 지휘자가 되자 본격적인 악단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 1년에 5~6차례씩 연주회를 열었다.
이 악단은 1989년 ‘남북 가곡의 밤’을 뉴욕에서 열며 이른바 ‘민족 음악’을 중심 테마로 잡았다. 남북의 가곡들을 한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무대를 꾸리는 것이었다. 리씨는 “당시 뉴욕에서 반응이 뜨거워서 미국 13개 도시 순회공연을 하게 됐다. 관객이 1만명을 넘었다”고 말했다.
2000년에는 악단 명칭을 ‘우륵관현악단’으로 바꿨다. 이전 명칭에 포함된 서울은 ‘서울대’에서 따온 것이었다. 리씨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널리 알려지고 남과 북 모두에서 거부감이 없는 음악가를 찾다 보니 신라시대 가야금을 만든 우륵을 떠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이 악단의 활동 보폭도 넓어졌다. 2001년 2월 북한예술단을 미국으로 초청해 합동 공연까지 하게 된 것이다. 북한예술단과 우륵관현악단은 미국 순회공연의 첫 무대를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었다. 당시 800여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리랑’과 ‘청산벌에 풍년 왔네’를 협연하고 북한 성악가들이 ‘압록강의 노래’ 등의 가곡을 불렀다.
리씨는 1989년 북한에서 첫 공연을 한 이래 수차례 북한을 방문해 공연을 했다. 남한에선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한차례 열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두차례 연 것 말고는 없다고 한다.
남북한 음악의 차이를 묻자 리씨는 “다 우리나라 음악이지 뭐…”라고 답했다. 다만 그는 “남한은 외국 음악에 치중하고 전문가들과 격식있는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북한은 민족음악을 내세우고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예컨대 북한은 피아노 협주곡을 해도 평소에 부르는 노래들을 넣는다”고 덧붙였다. 리씨는 “남북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음악으로 통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리씨는 미국에서 연주회를 시작한 지 32년째인 16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카우프만 뮤직센터에서 104회째 연주회를 열었다. 이날 음악회는 리씨에게는 남다른 행사였다. 평생의 은사인 안용구 전 서울대·피보디음대 교수 추모음악회였기 때문이다. 지난 8월 타계한 안 전 교수는 1950~60년대 한국 현악 교육의 큰 축을 맡아 강동석·김영욱·정경화 등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날 음악회에는 안 전 교수의 부인인 김정현씨 등 유족들도 참석했다.
뉴욕/글·사진 박현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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