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수 선임기자
정부는 29일 북한과 일본의 ‘스톡홀름 합의’가 나오자 “일본의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북핵 관련 대북 공조는 지속돼야 한다”는 논평을 냈다. 짐짓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이런 간단한 논평 하나 내는 데 무려 5시간 넘게 걸린 걸 보면 속내까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가 제대로 ‘한 방’ 먹고 허둥댄 분위기가 묻어난다. 발표 직전에야 일본의 통보를 받았다니 속된 말로 완전히 ‘물먹은’ 셈이다.
한·미·일 삼각 대북 압박 공조의 이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고, 과거 6자회담에서 납치자 문제로 뒷다리를 잡곤 했던 일본의 행태를 거론하며 “또 뒤통수를 쳤다”고 성토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이번 북-일 합의가 어떤 성과로 이어질지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북-일 간에 쌓인 불신의 깊이를 생각해 보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평양 방문 때 일본인 납치 사실을 전격 시인하고 납치 피해자 5명을 돌려보냈으나, 오히려 남은 납치 피해 의심자의 생존 여부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됐다. 한마디로 이제 시작이고 갈 길이 멀다.
경계해야 할 대목은 따로 있다. 자칫 우리가 한반도 문제 논의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반도 운명을 남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경험은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초 북핵 위기가 불거졌을 때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며 대책 없는 대북 강경론만 되뇌다 북-미 협상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고도 북-미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되는 경수로 건설 비용 70%를 떠맡아야 했다. 탈냉전의 큰 흐름을 무시하고 냉전적 대결의식에 사로잡힌 결과다.
지금은 어떤가. 정부는 남북 대결 구도를 해소하고 남북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큰 그림, 적극적 구상을 갖고 있는가? 박근혜 정부 하면 떠오르는 것은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있고, 동북아평화구상도 있다. 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도 있고, 통일대박론도 올해 새로 선보였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북한의 변화를 압박하는 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북쪽에 신뢰있는 행동을 요구하지만 남쪽은 어떤 신뢰를 보여줬는지 의문이다. 사실상 북한이 배제된 동북아평화구상이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어떤 실효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어떻게’가 없는 통일대박론은 또 한여름밤의 꿈과 얼마나 다를까.
스톡홀름 합의는 북한이 납북 피해자 문제를 재조사하고 대신 일본은 독자적인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사안을 주고받는 형식이다. 남쪽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북한에 요구하면서 금강산관광 재개 등 북한의 요구는 무시한 것과 다르다.
북-일 합의에 대해 통일부는 다음날 “우리도 납북자 문제, 고령화된 이산가족 문제가 있다”며 북한의 호응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번에 인도주의 사안과 경제적 사안의 맞교환을 성사시킨 북한이 지난 2월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처럼 여전히 빈손인 남쪽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다. 외교부는 6자회담 수석대표를 미국에 보냈다. 북-일 합의로 구멍난 한·미·일의 ‘철통 대북공조’ 수선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닐까.
대북 압박만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했다. 이제라도 정책을 현실성 있게 가다듬고 적극 나서서 풀어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도 남들 하는 얘기 받아적기 바쁘고, 원하든 원치 않든 남들이 낸 길을 뒤따라가야 한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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