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 둘째날인 14일, 크리스토퍼 힐 미국 수석대표는 “오늘은 경수로의 날이었다”며 “더 이상 ‘경수로의 주간’이 되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경수로를 ‘넌스타터’(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사안)라고 말했다. 그러나 2단계 회의 내내 경수로 주간이었다.
16일 오후…미뤄진 선택의 날= 17일은 선택의 날이었다. 우다웨이 중국 수석대표는 16일 오후 전체회의에서 경수로를 담고 있는 5차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는 17일 오후 3시까지 본국훈령을 받아 수용과 거부 양자 택일의 입장을 밝힐 것을 통보했다. 송민순 한국 수석대표는 이날 기자들에게 “6자회담의 결과를 어떻게 가져갈 지에 대한 중대한 고비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17일에 이어 18일에도 6자회담 대표들은 “내일 다시 전체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제의 내일’은 또 ‘오늘의 내일’이 되는 그런 식이었다.
16일 저녁…북한, 초강경 자세= 북한은 5차 수정안이 나온 뒤인 16일 저녁, 현학봉 대표단 대변인의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을 비난하는 초강경 발언을 했다. 그는 미국의 입장은 선 핵포기라고 주장하면서 이는 ‘천진란만한 요구’, ‘강도적 요구’라는 등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 경수로 요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국의 선 핵폐기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5차 수정안이 미국의 선 핵폐기를 수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17일 북한 언론들은 일제히 “미국이 신뢰의 기본 척도인 경수로를 주지 않겠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로서는 우리식의 평화적 핵활동을 순간도 멈출 수 없게 될 것”이라며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현 대변인의 발언에는 이런 비난과 함께, “경수로 문제에서 미국의 우려를 고려해 운영을 공동관리에 맡기고 사찰도 받을 것”이라는 점이 재강조되고 있었다.
미국은 워싱턴과 베이징 현장 대표단간에 온도차가 느껴졌다. 힐 수석대표는 16일 경수로 문제와 관련해 “여전히 비지니스를 하고 있다”고 말해, 협상의 여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른다”라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는 힐이 이날 오후 내내 워싱턴과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고 전했다. 캐나다를 방문 중인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부탁했다.
17일 오후…북한·미국 모두 거부자세?= 중국이 결단의 시간으로 밝힌 17일 3시를 넘어, 3시50분에 전체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회의는 불과 10분만에 끝났다. 정부 당국자는 18일 오전 9시에 다시 회의를 열기로 했다면서, “일부 국가들이 본국 훈령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만이 5차 수정안에 대한 수용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깨지기 쉬우면서도 미묘한 균형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8일 오전 9시 이번엔 수석대표가 참가한 전체회의가 열렸다. 힐 수석대표는 회의 전 “초안의 문구에 대해 여전히 이견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수석대표회의는 8분만에 정회했다. 오전 11시50분 다시 열렸으나 역시 30분만에 끝났다. 힐 차관보는 “미국은 덜 애매한 표현을 선호한다”는 말로 중국이 내놓은 5차 수정안의 수정을 꾀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의 자세에 변화가 있을 리 없었다. 결렬쪽으로 가는 분위기였다.
17일과 18일…한국 미국 설득에 승부 걸어= 한국은 미국 설득에 총력을 기울였다. 뉴욕을 방문 중인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17일(미국시각)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만나, “한국 정부는 5차 초안을 수용키로 했다”며 미국에 수용을 촉구했다. 경수로 수용으로 중대제안을 사실상 포기한 한국으로서는 승부를 건 셈이다. 미국이 경수로에 완강한 거부 자세를 보여왔기에 무리수라는 지적도 뒤따랐다. 그러나 반 장관은 한국의 설명에 대해 라이스 장관의 교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베이징 한국대표단에 긴밀한 협의를 통해 최종타결 노력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18일밤…미국 극적인 자세변화 18일 밤 힐 수석대표는 의외의 말을 했다. 중국의 5차 초안을 ‘좋은 안’이라고 말하고, 19일 합의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19일 오후엔 비행기를 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정부는 미국이 거부자세를 고수하면 결렬 책임이 북한과 미국 양쪽에 있게 되고, 이 경우 미국으로서도 북한을 압박할 명분과 수단이 없게 된다는 점을 들어 미국을 강하게 설득했다. 워싱턴쪽이 경수로에 대한 완강한 거부자세를 완화한 데는 제네바 합의 당시의 경수로와 다르다는 설명도 주효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사찰을 수용하고 경수로를 공동관리에 맡기겠다고 한 점도 고려됐다는 후문이다. 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돋보인 한-중 연합전술
북-미 ‘죄수의 딜레마’ 몰아
“선택 안하면 손해” 결단케
한국과 중국은 ‘설득과 압박’으로 회담을 이끌었다.
한국은 북-미 대립을 비집고 들어가 ‘미래의 창’이라는 개념으로 경수로 해법을 제시했다. 중국은 이를 토대로 북-미를 몰아붙여 전략적 결단을 유도했다. 회담 막판 북-미가 공동성명 5차 초안에 대한 답변을 머뭇거리자, 한국은 미국의 수용을 공개적으로 주문했고, 중국은 모든 채널을 동원해 북한의 선택을 재촉했다.
한국과 중국의 이런 연합전술은 북-미를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에 빠뜨렸다. 두 명의 공범이 격리된 뒤 자백을 요구받을 경우, 둘 다 자백하지 않는 게 최선인 줄 알면서도, 상대에 대한 불신 때문에 자백하게 된다는 게임이론인 ‘죄수의 딜레마’는 북-미를 ‘선택의 순간’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북-미는 공동성명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자기만 손해를 볼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게임이론은 흔히 전략론에서 핵억지력의 문제를 모델화하는 데 응용된다.
한국 중대제안 포기 회생
한국은 이 과정에서 신포 경수로 사업 종료를 전제로 북한에 전력을 공급한다는 이른바 ‘중대 제안’을 거둬들일 수 있음을 내비쳤다. 스스로 유연성을 보임으로써 북-미의 유연성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래의 창’이라는 개념을 경수로 해법으로 제시하면서도, 끝까지 성사 여부를 낙관하지 못했다. 자칫 북-미 양쪽으로부터 욕을 먹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회담 관계자는 “북-미 대립이 워낙 날카로워 어설프게 끼어들 경우, 한국만 상처만 입을 것을 우려해 개념을 제안하는 시기를 저울질했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단은 이후 말을 아끼며 북-미 동향에 촉각을 기울였다.
중, 퇴로 닫고 미국 압박
중국은 이를 기초로 공동성명 초안을 내놓고 북한과 미국에 ‘치킨 게임’을 강요했다. 두 사람이 각각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를 가리키는 ‘치킨 게임’으로 상황을 몰아가 수용 여부를 압박한 것이다. 북-미로선 수용하지 않을 경우 파국의 책임을 뒤집어쓰는 상황이 펼쳐진 셈이다. 치킨 게임은 흔히 군비경쟁의 논리를 설명할 때 쓰이고, 먼저 핸들을 꺾는 쪽이 패자가 된다. 하지만 이번엔 협상의 무대에 적용되면서 모두가 승자가 되는 논리로 바뀌었다.
중국은 타결이냐 결렬이냐 양자택일을 요구하면서 북-미를 몰아붙였다. 더 이상 공동성명 초안을 수정할 수 없다며 북-미의 퇴로를 닫아버렸다. 지난 1단계 회담에서 4차례나 초안을 수정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의장국이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해 게임의 규칙을 정해버린 것이다. 19일 오전 공동성명 채택을 위한 전체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각국 대표들의 책상에는 ‘공동성명’이라는 글자가 박힌 문건이 놓여 있었다.베이징/유강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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