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응하기 위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기로 한 8일 오전 육군 장병들이 경기 연천군 중부전선에 설치된 대북 확성기에서 위장막을 걷어내고 있다. 연천/사진공동취재단
8일 정오 경기 중부전선엔 얼음칼에 베일 듯한 긴장이 감돌았다. 대북 확성기 방송이 영하 10도의 날씨에 얼어붙은 찬 공기를 뒤흔들었다. 정부가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응한다며 지난해 ‘8·25 합의’ 뒤 중단한 대북 확성기 방송을 136일 만에 재개했다. 확성기가 설치된 11곳의 전방 지역에는 최고경계태세(A급)가 발령됐고, 북쪽의 공격에 대비해 대북 경계·타격 무기 등이 보강됐다. 너비 3m, 높이 6m의 대북 확성기는 남과 북 양쪽에 극도의 긴장감을 퍼뜨렸다.
군 관계자는 “방송 재개 자체가 북한에 심리적 타격을 줄 수 있다.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방송을 한다”고 말했다. 대북 방송에는 북쪽에서 ‘최고존엄’으로 불리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를 겨냥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날은 김 제1비서의 생일이다. 대북 방송은 북한 주민의 인권을 언급하며 김 비서의 핵실험이 북한 사회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군당국이 제작하는 <자유의 소리 방송>은 하루 2~6시간 확성기별로 불규칙하게 송출된다. ‘뉴스’, ‘남한의 발전상’, ‘북한의 실상·체제 비판’ 등이 담긴다. 또 라디오 드라마·최신가요도 포함되는데, 이번 방송에는 가수 이애란씨의 ‘백세인생’, 걸그룹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 등이 포함됐다. 대북 확성기가 설치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군 소초(GP)는 불과 2㎞ 거리에 있다. 스피커의 음향이 전달되는 거리는 밤에는 전방 20㎞ 이상, 낮에는 10㎞ 이상이라고 한다. 비무장지대(DMZ)의 북쪽 구역을 벗어나 북쪽 민간인 거주지까지 방송이 전파될 수 있다는 뜻이다. 확성기 근처 방송실 문에는 “진실을 알리자”는 문구가 붙어 있다.
이날 오후 북쪽 인민군도 자체 확성기 방송으로 대응했다. 군 관계자는 “출력이 약해 남쪽에서는 ‘웅웅’ 하는 소리 말고는 들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북한군 병사들이 남쪽의 확성기 방송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차원이라는 지적이다. 군은 북한의 군사적 대응엔 ‘단호한 응징’을 예고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와 군이 “북한에 심리적 타격을 준다”며 재개한 대북 확성기 방송은 휴전선 주변 경기·강원 접경지 지역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안쪽 마을인 경기도 파주 해마루촌 주민 이재석(50)씨는 “심리전 형태도 전쟁 수단의 일환이며 지난번 본 것처럼 상대 대응에 따라 실제 포격이 오가는 전쟁 상황까지 갈 수 있다고 본다. 지난해에도 주민들이 대피소 생활을 했는데 멀쩡히 살던 집을 떠나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우 불안하다”고 말했다.
이날 제3땅굴과 도라산전망대 등 접경지역 안보관광이 전면 중단됐고, 민통선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민통선 지역 농민 전환식씨는 “대화로 해결 방안을 찾아야지 ‘한판 붙자’는 식의 감정만 자극하는 대응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묻고 싶다. 출입 제한으로 농작물 피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전방부대 장병의 외출·외박도 전면 중단돼 강원도 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등 접경지역 시가지는 썰렁할 정도로 한산했다. 양구 읍내에서 10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이승재(57)씨는 “군장병들 보고 장사를 하는데 주말을 앞두고 외출·외박이 금지돼 손해가 막심하다. 싸우면 손해다. 하루빨리 남북 긴장이 해소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산천어축제 대목을 앞둔 강원도 화천군 주민들은 이번 사태로 접경지역의 안전에 불안을 느낀 관광객들이 발길을 돌릴까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화천 상서면의 길연수(58) ‘디엠제트사방거리 동동축제위원장’은 “지난해 8월처럼 축제를 진행하다 주민 모두 대피해야 할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와중에 북한민주화추진협의회·탈북인단체연합회 등의 단체는 “개성공단과 민간단체들의 대북 지원을 즉각 중지시켜야 한다. 대북 방송과 대북 전단 사업을 새롭고 전투적인 차원에서 전개·확대시키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확성기 방송 재개가 남북관계에 기름을 끼얹었는데 대북 전단 살포는 부채질까지 하는 격”이라고 말했다.
국방부 공동취재단, 이승준 기자, 파주 화천/박경만 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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