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6일 4차 핵실험을 벌인 뒤로 미국만 상대하는 모양새다. 외무성 대변인 담화까지 동원해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핵실험 동결을 주고받자는 지난해 제안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면서 핵개발 이유가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에 있음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안으로는 ‘수소탄 보유국’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내부 결속을 통한 ‘경제강국’ 목표를 내세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대북 제재의 열쇠를 쥔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의사 표현은 없다. 남쪽에 대해서도 대북 확성기 방송을 통한 심리전 재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도의 방식으로 조용히 맞서고 있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북한 지도부 구성의 일부 변동이 이뤄졌다. 눈에 띄는 인물은 최룡해 노동당 근로담당 비서와 김영철 인민군 정찰총국장 겸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다. 최룡해와 김영철은 공통적으로 4차 핵실험 전후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말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양건 노동당 대남비서가 둘의 연결고리인 것도 공통점이다. 실각설로 자취를 감췄던 최룡해는 지난해 말 김양건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다시 이름을 올렸고, 핵실험 직후 줄곧 북한 매체에 등장하며 복권을 알렸다. 김영철은 군복을 벗고 김양건의 뒤를 이은 것으로 관측된다. 사실상 첫 군부 출신의 대남 총괄 책임자의 등장인 셈이다. 최룡해의 복권과 김영철의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 비서 임명설은, 국제사회의 제재 국면에서 북한의 중국과 남한에 대한 대응 방향을 엿볼 수 있는 주요한 실마리다.
최룡해 당 비서의 복권은 석달여 만이다. 20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최룡해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수행 사실을 보도해 최룡해의 ‘복권’이 최종 확인됐다. 새로 지어진 청년운동사적관 현지지도였는데, 최룡해의 김 제1비서 수행은 지난해 10월19일 보도된 모란봉악단 공연 관람 이후 처음이다. 최룡해는 14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창립 70돌 경축행사 대표증 수여’ 행사에 참석하며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운동사적관 현지지도나 청년동맹 창립 기념행사 등에 최룡해는 근로담당 비서 자격으로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룡해의 재등장을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북 제재를 주도하고 있지만 핵심 열쇠는 중국이 쥐고 있다. 중국은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임이사국이자 북한의 이웃나라로 가장 활발한 교역국이다. 북한의 전체 대외무역에서 북·중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이른다. 한·미·일 3국은 최대치의 강력한 제재를 하겠다고 벼르지만 중국은 유엔 안보리 제재에 찬성하면서도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말 모란봉악단의 베이징 공연 취소와 이번 핵실험으로 북-중 관계가 악화된 터이지만, 북한으로선 대중 관계를 관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과거 김정은 제1비서의 특사로 중국·러시아 등을 방문한 최룡해가 꼬일대로 꼬인 북-중 관계를 복원할 임무를 맡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최룡해는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북-중 관계가 급랭했던 2013년 5월과 중국의 전승절 70년 기념행사가 열린 지난해 9월 김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방중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었다. 아울러 2014년 11월 역시 김 제1비서의 특사로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과 만나 ‘전제조건 없는 6자 회담 재개’ 의사를 전달했다.
김영철은 앞으로 북한의 대남 정책을 가늠할 수 있는 실마리다. 1980년대 후반부터 남북대화에 관여한 북한 군부 내 대표적인 대남통이어서 통일전선부장과 노동당 대남 비서를 맡을 자격은 갖췄다는 평가가 많다. 대개 통전부장과 대남 비서를 배출해온 통전부와 국제부 인사 중 마땅한 후임자가 없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는 1989년 남북 고위당국자회담 예비접촉 때 북쪽 대표였고 1990년 남북 고위급회담 때도 북쪽 대표단에 참여했다. 그 뒤로도 남북 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 북쪽위원장(1992년), 남북 정상회담 의전경호 실무자접촉 수석대표(2000년),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북쪽대표(2006~2007년), 남북 국방장관회담 북쪽 대표단(2007년) 등을 맡아왔다. 김영철은 2009년 중장에서 상장으로 승진하면서 대남공작 사령탑인 총참모부 정찰총국장에 임명됐다.
‘김영철 통전부장설’과 관련해 첫 군 출신 통전부장의 등장이 남북관계에 끼칠 영향을 두곤 전망이 엇갈린다. 정부는 천안함·연평도·목함지뢰 사건 등의 배후로 김영철을 지목해왔다. 이 때문에 대남 온건·합리파로 알려진 김양건과 달리 김영철은 대남 강경파로 꼽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김영철은 2013년 3월5일 <조선중앙텔레비전>에 나와 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명의로 ‘정전협정 백지화’를 발표하며 “미제에 대해 다종화된 우리식의 정밀 핵타격 수단으로 맞받아치게 될 것”이라며 “(이를) 퍼부으면 불바다로 타번지게 돼 있다”고 위협한 적도 있다. 이런 점들을 들어 일부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북한은 적어도 당분간은 남북관계 개선을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라고 짚었다. 4차 핵실험에 대한 국제 제재를 앞두고, 별다른 제재 수단이 없는 남한보다는 유엔 안보리 이사국인 미국과 중국을 주로 상대하겠다는 뜻이 숨어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김영철의 새 대남 비서 임명이 남북 대화 단절을 뜻하지 않으리란 분석도 많다. 인민군 정찰총국이 만들어지던 2009년부터 대남 정책이 김양건 대남 비서 겸 통전부장과 김영철 정찰총국장의 양대 축으로 운영돼왔으므로, 김양건 사망 이후 자연스럽게 김영철이 대남 총책을 맡게 됐다는 판단에 근거를 둔 전망이다. 특별히 대남 강경·도발을 위해 김영철을 내세운 것은 아닐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영철의 등장이 남북관계의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정부 당국자도 많지 않다. 그보다는 김영철이 때로는 강경하고 때로는 융통성을 보이는 등 매우 능수능란한 협상 전문가여서 어려운 대화 상대라고 평가하는 당국자들이 많다.
핵실험 이후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적극적인 대화 공세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등 국제사회에 핵보유국 인정을 요구하며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남쪽에도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와 ‘평화체제’ 마련을 요구하며 대화를 제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2014년 10월 서해 북방한계선(NLL) 교전 사태 때 남쪽에 ‘긴급단독접촉’을 제의하며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상대로 김영철을 내세웠었다. 당시 남쪽이 회담 대표로 수정 제의한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과 국방위원회 서기실 책임참사 직책으로 나온 김영철이 회담을 했지만 견해 차는 좁히지 못했다.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