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독일 베를린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북녘의 형제 자매들> 상영회에 참석한 독일 청각장애인 로베르트(오른쪽) 르마르크 그룬트와 친형 마르코(왼쪽).
“내가 만일 아프리카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거기서 뭘 하느냐고 물을 거예요. 하지만 북한이라고 하면, 누구나 ‘왜’냐고 물어요. 미디어 보도 때문에 생기는 큰 차이점입니다. 이게 좀 슬프고 아쉬워요.”
로베르트 르마르크 그룬트(31)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북한 청각장애인들을 돕는 단체 ‘투게더 함흥’(together-hamhung.org)의 대표다. 그는 최근 4년간 북한에 머물며 함흥에 청각장애인·시각장애인·비장애인 통합학교를 세웠다. ‘투게더 함흥’ 회원들은 주로 청각장애인이고, 기부자들은 독일인과 일본인이다.
지난달 24일 한국문화를 독일에 알리는 단체인 코리아재단이 베를린에서 조성형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영화 <북녘의 형제 자매들>을 상영하는 자리에서 그룬트를 만났다. 인터뷰는 훗날 서면으로 이뤄졌다.
“북한 장애인 실태 아무도 모른다”
중학때 얘기 듣고 ‘가보겠다’ 결심
19살때 첫 방북 12년째 ‘돕기’ 앞장
2008년 베를린에 ‘투게더 함흥’ 세워
청각장애인센터·유치원·목공소 지원
4년간 머물며 비장애인 통합학교도
“장애인 삶 개선은 정치·이념과 별개”
지난 2012년 북한 평양에서 청각장애인 지원 사업을 할 때 로베르트(뒷쭐 오른쪽 세번째)와 마르코(앞줄 맨 오른쪽)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 화면. 로베르트 룬트 제공
그룬트가 북한 청각장애인 돕기를 시작한 계기는 15살 때인 2000년 어느날 저녁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세계청각장애인연맹 총장의 인터뷰를 본 것이었다. 그는 북한의 청각장애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전혀 없다고 얘기했다. 4대째 청각장애인 집안에서 자란 그는 세계 각국의 청각장애인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북한에 청각장애인들이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북한에 가 봐야겠다고 결심했고, 마침내 4년 뒤 19살 때 북한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는 북한의 공공장소에서 장애인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세번째 방문한 2006년에야 그는 처음으로 청각장애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한국말을 모르고 북한 수화는 독일 수화와 달랐지만, 북한에 최초로 청각장애 아동유치원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독일과 북한 간의 거리, 독일 수화와 북한 수화, 독일 교육과 북한 교육, 엄청난 문화의 간극을 극복하고, 평양의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청각장애인 센터·유치원·목공 작업장을 만들었다. 우리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성과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수화를 할 줄 모르는 공무원들과 소통하기가 힘들었다. 공무원들은 내가 청각장애인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북에서의 일상은 매일 매일이 도전이었다. 다음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인터넷 사정이 어려웠던 탓에 통신 연결 상태가 어떤지, 북한 당국의 허가 결정이 어떻게 나는지에 따라 하루하루 일정이 정해졌다.
그룬트는 2008년 5월 세계청각장애인연맹과 조선장애인보호협회의 공동작업을 위해 세계청각장애인연맹 특사로 북한에 갔다. 그때 북쪽으로부터 청각·시각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를 위한 통합교육센터를 설립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려고 그해 11월 베를린에 ‘투게더 함흥’을 열었다. 그는 “우리 협회는 우리가 직접 우리를 대표하는 조직이다. 즉, 이사진에는 청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보다 더 많다. 협회의 프로젝트를 하는 과정에서 회원 누구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장애인의 프로젝트 참여는 의무조항이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의 청각·시각 장애 어린이들은 열악한 환경에 살고 있다. 북한 당국도 장애인 환경이 개선되기를 원하고 있고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장애인들과 더불어 스스로 그 삶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는 정치나 이념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지난 10월26일 그룬트는 북한에서 일을 잘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독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북한청각장애자협회는 이제 매우 안정된 상황이고, 내 도움이 없어도 일이 잘 진행된다. 4년 전에는 청각장애자협회도 센터도, 유치원도 없었다. 지금은 27석짜리 버스와 수화통역협회도 생겼다. 이건 모두 세계청각장애인연맹과 조선장애인보호협회의 프로젝트 안에서 성사된 일이다. 이 일을 함께 한 장애인들을 비롯한 북한 분들은 많은 일을 해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게 됐다. 그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고 감회를 밝혔다.
요즘 그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진행했던 북한 장애인 지원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으며, 내년에는 북한 재난지역의 청각장애인들을 돌볼 준비를 하고 있다. 또 청진에도 청각장애인 센터와 유치원을 세울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베를린/글·사진 한주연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