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기획] 해빙을 기다리는 사람들
한파는 느닷없이 밀려왔다.
“북한은 4차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까지 발사하는 극단적인 도발을 감행하였습니다. … 이제 정부는 더 이상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이용되는 것을 막고, 우리 기업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16년 2월10일, 북쪽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이 막혔다.
■ 시장이 통째로 사라졌다 그때 개성공단에선 약 5만5천명이 일하고 있었다. 북쪽 노동자가 5만4천여명, 남쪽 주재원이 700~800명가량이다. 5만5천명이 먹는 하루 세끼 밥, 16만5천명 분이다. 그들이 먹고 쓸 식자재와 각종 생활용품을 납품하는 업체가 따로 있는 건 당연하다. 삼우유통이 그 하나였다.
“장사 잘 되던 시장이 어느날 갑자기 통째로 사라져버린 거다.” 임진석(56) 사장은 헛헛하게 웃었다. 2010년 5월 개성공단에 진출한 임 사장은 125개 입주기업에 쌀·고기·채소 등 식자재와 라면 등을 납품해왔다.
초코파이 3만개 납품 임 사장
장사 잘되던 시장 통째로 날아가
피해 입증할 거래장부 다 개성에
신체포기각서 쓸테니 날 보내달라 “원래 주유소 등에 납품하는 화장지 공장을 하다가, 고향 후배의 권유로 개성공단 진출을 결심했다. 제조업을 하고 싶었지만, 교류협력 승인이 나지 않아 유통으로 방향을 틀었다.” 삼우처럼 식자재·생활용품 공급업체를 흔히 ‘유통’으로 분류한다. 여기에 식당·편의점·당구장 등 편의시설을 운영하는 ‘서비스’와 공단의 크고작은 공사를 도맡는 ‘건설’을 묶어 ‘영업기업’이라 부른다. 개성공단 폐쇄 직전까지 등록된 영업기업은 84개, 실제 영업을 한 업체는 65개사다. 삼우유통이 개성공단 등록을 마친 날은 2010년 5월17일이다. 그런데 한 주 뒤 이명박 정부가 5·24 대북제재 조처를 발표했다. 개성공단 빼고 다 닫혔다. 남북 사이에 냉기류가 가득했다. 임 사장은 하나 둘씩 환경을 바꿔 나갔다. 물건을 쌓아둘 창고도, 물건을 나를 노력(노동자)도 치열하게 싸워 얻어냈다. 남북 당국자들은 임 사장만 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북관계가 요동치면 개성공단도 폭풍 속의 작은 배처럼 흔들렸다. 2013년 공단이 넉달 남짓 가동을 멈췄다. 논란 끝에 남과 북은 그해 8월12일 5개항의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통행 차단과 근로자 철수조치 등으로 인한 가동중단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에 영향을 받음이 없이 정상적 운영을 보장하기로 하였으며….” 하지만 2016년 2월10일 오후 5시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처를 발표했다. 영업기업 쪽은 미리 연락받지 못했다. 임 사장은 “개성에 모든 걸 건 사람들은 그야말로 모든 걸 잃었다”고 말했다. 재고물품도 문제지만, 외상매출 등 거래장부가 모두 개성에 있었다. 개성에선 미수금을 받지 못했고, 남쪽에서 진 외상은 갚아야 할 처지로 몰렸다. 피해를 증빙할 방법이 없으니 피해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임 사장이 목청을 돋웠다. “정부는 안전 때문에 못 보내겠다고 한다. 그럼 내가 신체 포기각서라도 쓰겠다. 그러니 보내달라. 가서 장부도 가져오고, 증빙서류도 가져오겠다. 그러면 그나마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 그 많던 조개구이집은 다 어디로 갔나?” 황창환(56) 목민어소시에이션 사장은 30대 초반 대북 사업에 눈을 떴다. 그가 중국 베이징에서 북쪽 경협 일꾼들을 처음 만난 땐 1994년 12월25일이다. 그는 북한에서 ‘또 하나의 보물’로 불리는 금강약돌에 주목했다. 풍부한 미네랄 성분 때문에 북에선 의료용으로 쓰인다고 했다.
부영물산이란 회사를 차리고, 이듬해부터 금강약돌을 들여와 옥매트를 만들었다. 연간 매출이 순식간에 100억원대에 육박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나? 2000년께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다 망했다. 손에 남은 자금이 많지 않았다. 북쪽에서 수산물 교역을 제안했다. 북쪽 개선총회사를 통해 대합·가리비·바지락 등 어패류를 들여왔다.
북한산 수산물 교역 황 사장
30대부터 시작한 대북사업 물거품
조개구이집들도 대부분 망했잖아요
합치면 맛있는…그게 바로 남북경협 인맥이 쌓이며 거래처도 늘었다. 한해 매출 40억원대를 바라봤다. 그는 다시 사업 확장을 구상했다. “남한에서 잡히는 서해 조개로는 자급률이 30% 정도밖에 안 된다. 북쪽과 협의해 원산에 대형 수족관을 짓고 가리비 양식을 해볼 참이었다.” 그러던 2010년 3월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졌고, 5·24 대북제재 조치가 내려졌다. 날려버린 투자금이며 은행대출은 고사하고 이자 갚기도 버거웠다.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한동안 유행하던 조개구이집이 다 어디 갔는지 아나?”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조개는 원래 서해안 벨트에서 많이 먹었다. 그게 육지로 상륙했다. 유행을 타자 조개구이 전문 체인점까지 생겨났다. 당시 조개구이집에서 팔던 물량의 80% 정도가 북한산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대북사업 하는 사람뿐 아니라, 조개구이집 차린 사람들까지 다 망했다. 이데올로기로 따질 게 아니다. 합치면 맛있는 거 많이 먹는 거, 그게 남북경협이다.”
■ 2년의 설레임, 6년의 절망, 그리고 건설업자로 잔뼈가 굵은 이원철(61) 시엔에스 엔지니어링 사장을 대북 사업으로 이끈 힘은 ‘우연’이었다. 대북 사업을 하는 나우코퍼레이션이란 업체에 자금을 대줬다가, ‘어쩌고들 있는지 보려고’ 평양에 따라가봤다. 2008년 초다. “많이 낙후돼 있더라. 남쪽의 좋은 기술과 풍부한 자금을 투자하면 사업 전망이 무궁무진해 보였다.”
모색 끝에 ‘불수강’(스테인레스) 특수 파이프 사업을 하기로 했다. 평양 남서쪽 낙랑구역에 3천평을 마련해 공장을 지었다. 노동자도 700명 확보했다. 꼬박 2년여 준비 기간에 투자한 금액은 150억원에 이른다. 이 사장은 “연매출 1천억원은 자신했다”고 말했다.
스테인리스 파이프 사업 이 사장
평양에 150억 들여 공장지었건만
5.24 제재로 길 막혀 파산신청 신세
북한이 공장 돌려 돈 많이 번답니다 공장 가동 시점이 다가왔다. 제품이 생산되면 석탄·아연 같은 지하자원으로 대금을 받아 남쪽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이 사장은 “7월부터 석탄이 내려오기로 했다. ‘에이급’으로, 열량 좋은 것으로 받기로 했다. 납품 약속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석탄은 오지 않았다. 5·24 조치로 평양 가는 길이 막혔다. 북쪽에선 계속 방북 초청장을 보내왔다. 간신히 개성에서 공장장 등과 만났다. 이 사장은 “곧 풀릴 거니까, 서로 참고 기다리자”고 했다. 벌써 6년 전이다. 이후 그의 삶은 여느 경협 기업인과 다르지 않다. 재산은 모두 경매로 넘어갔다. 담보로 잡힌 부동산도 날아갔다. 파산 신청도 해야 했다. “엊그제 경협 기업인들 송년회를 했는데, 회비가 2만원이었다. 그 돈도 없어 못내는 사람들이 있더라. 다들 기업하던 사람들인데….” 기막힌 세월이다. 얼마 전 이 사장은 중국 쪽을 통해 공장 소식을 탐문했다. ‘광명’(광명성총회사로 보임)이란 회사가 공장을 가동한다고 했다. 최근 몇년 새 평양에 아파트가 잔뜩 들어서는데, 이 사장의 공장에서 생산한 스테인레스 파이프를 팔아 돈을 많이 벌고 있단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 1998년 11월18일~2008년 7월11일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온정각 서관 온천장 앞 우리 매장…” 전경수(57) 다물아트 사장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는 1998년 11월18일 금강산으로 가는 첫 배인 현대금강호를 통해 금강산과 인연을 맺었다.
대기업에 다니다 사업에 뛰어든 그의 창업 아이템은 시계였다. 백화점과 대기업 쪽에 납품선을 뚫으며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졌다. “3년여 사업해 번 돈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그 무렵 ‘왕회장’(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을 하더니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아, 저거다’ 싶었다.”
금강산 관광 납품사업 전 사장
시계 이어 수제맥주 사업권까지
우리 매장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해
8년 세월 기다리다…촛불을 듭니다 관광 초기, 입점 경쟁이 엄청났다. 전 사장은 대형 서점에서 금강산 관련 책을 모조리 사들여 읽고 또 읽었다. 조각가에게 맡겨 인조 대리석을 금강산 모양으로 깎고, 수작업으로 색칠을 했다. 그렇게 만든 시계를 들고 금강호에 입점했다. 2003년 9월1일 육로 관광길도 열렸다. 기존 인프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현지 매장으로 자리를 옮긴 전 사장도 2006년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경쟁도 치열해졌다. 4평짜리 매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4명이 함께 10억원을 투자해 신규 법인을 만들었다.” 어렵사리 수제 맥주 브랜드 ‘오버스트 하우스’ 사업권을 따냈다. 전 사장은 남쪽 사업을 모두 접고 금강산에 다 걸었다. 2008년 봄부터 매출이 올랐다. 팬션·콘도 등 숙소도 대폭 늘었고, 골프장도 개장을 앞두고 있었다. 식자재며 기념품이며 상품을 최대한 준비했다. 미리 갖다 놓지 않으면 통관 등에 시간이 걸려 물건이 동날 수 있어서다. 2008년 7월11일 그가 남쪽에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박왕자씨 피격) 소식을 듣고 바로 금강산으로 올라갔다. 그 이전에도 인명사고가 있던 터라 문을 닫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두어달 중단됐다가, 성수기인 가을엔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기다렸다. 정부도 ‘잠정중단’이라 했지, ‘폐쇄’라고 하지 않았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서너차례 금강산에서 열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8년여를 살아왔다. 요즘 전 사장은 촛불을 든다. 독감이 심했던 7차 때를 빼고, 10월29일 1차 촛불집회 때부터 빠지지 않는다. ‘2018년 봄’까지 아예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촛불 가득한 광장에서 희망을 키우고 있다. 전 사장은 “(금강산 관광을) 열려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 열 수 있다. 인력과 자재를 집중 투입하면 한달이면 충분하다”고 힘을 주었다. ■ 2016년 12월28일 세밑 칼바람이 광장을 휘몰아친다. 내륙경협기업과 금강산기업인들이 꾸린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원회는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12월28일로 86일째 천막농성 중이다. 개성공단영업기업비상대책위원회도 12월6일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무기한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쪽은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상태다. 대리인을 맡은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 김광길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국민의 재산권을 수용·제한하면서도 적법한 절차(긴급명령 발동)를 거치지 않았고,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아 재산권 보장 의무를 저버렸다. 어떠한 경우에도 개성공단 폐쇄는 없다던 남북합의서를 위반한 것은 신뢰 보호의 원칙에 반한다.” 100만개의 촛불이 모여 광장을 데우고 있다. 기상청은 12월28일 낮 서울의 체감기온이 영하 7도라고 전했다. ‘봄’은 언제쯤 올까?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끝까지 간다!9차 범국민행동-박근혜 정권 즉각 퇴진, 조기 탄핵, 적폐 청산 행동의 날' 집회가 열린 24일 저녁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 금강산기업인협의회와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원회의 생존권보장 요구 천막농성장 옆을 촛불을 든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임진석 삼우유통 사장
장사 잘되던 시장 통째로 날아가
피해 입증할 거래장부 다 개성에
신체포기각서 쓸테니 날 보내달라 “원래 주유소 등에 납품하는 화장지 공장을 하다가, 고향 후배의 권유로 개성공단 진출을 결심했다. 제조업을 하고 싶었지만, 교류협력 승인이 나지 않아 유통으로 방향을 틀었다.” 삼우처럼 식자재·생활용품 공급업체를 흔히 ‘유통’으로 분류한다. 여기에 식당·편의점·당구장 등 편의시설을 운영하는 ‘서비스’와 공단의 크고작은 공사를 도맡는 ‘건설’을 묶어 ‘영업기업’이라 부른다. 개성공단 폐쇄 직전까지 등록된 영업기업은 84개, 실제 영업을 한 업체는 65개사다. 삼우유통이 개성공단 등록을 마친 날은 2010년 5월17일이다. 그런데 한 주 뒤 이명박 정부가 5·24 대북제재 조처를 발표했다. 개성공단 빼고 다 닫혔다. 남북 사이에 냉기류가 가득했다. 임 사장은 하나 둘씩 환경을 바꿔 나갔다. 물건을 쌓아둘 창고도, 물건을 나를 노력(노동자)도 치열하게 싸워 얻어냈다. 남북 당국자들은 임 사장만 보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북관계가 요동치면 개성공단도 폭풍 속의 작은 배처럼 흔들렸다. 2013년 공단이 넉달 남짓 가동을 멈췄다. 논란 끝에 남과 북은 그해 8월12일 5개항의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통행 차단과 근로자 철수조치 등으로 인한 가동중단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정세에 영향을 받음이 없이 정상적 운영을 보장하기로 하였으며….” 하지만 2016년 2월10일 오후 5시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처를 발표했다. 영업기업 쪽은 미리 연락받지 못했다. 임 사장은 “개성에 모든 걸 건 사람들은 그야말로 모든 걸 잃었다”고 말했다. 재고물품도 문제지만, 외상매출 등 거래장부가 모두 개성에 있었다. 개성에선 미수금을 받지 못했고, 남쪽에서 진 외상은 갚아야 할 처지로 몰렸다. 피해를 증빙할 방법이 없으니 피해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임 사장이 목청을 돋웠다. “정부는 안전 때문에 못 보내겠다고 한다. 그럼 내가 신체 포기각서라도 쓰겠다. 그러니 보내달라. 가서 장부도 가져오고, 증빙서류도 가져오겠다. 그러면 그나마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황찬환 목민어소시에이션 사장
30대부터 시작한 대북사업 물거품
조개구이집들도 대부분 망했잖아요
합치면 맛있는…그게 바로 남북경협 인맥이 쌓이며 거래처도 늘었다. 한해 매출 40억원대를 바라봤다. 그는 다시 사업 확장을 구상했다. “남한에서 잡히는 서해 조개로는 자급률이 30% 정도밖에 안 된다. 북쪽과 협의해 원산에 대형 수족관을 짓고 가리비 양식을 해볼 참이었다.” 그러던 2010년 3월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졌고, 5·24 대북제재 조치가 내려졌다. 날려버린 투자금이며 은행대출은 고사하고 이자 갚기도 버거웠다.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한동안 유행하던 조개구이집이 다 어디 갔는지 아나?”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조개는 원래 서해안 벨트에서 많이 먹었다. 그게 육지로 상륙했다. 유행을 타자 조개구이 전문 체인점까지 생겨났다. 당시 조개구이집에서 팔던 물량의 80% 정도가 북한산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대북사업 하는 사람뿐 아니라, 조개구이집 차린 사람들까지 다 망했다. 이데올로기로 따질 게 아니다. 합치면 맛있는 거 많이 먹는 거, 그게 남북경협이다.”
이원철 시엔에스 엔지니어링 사장
평양에 150억 들여 공장지었건만
5.24 제재로 길 막혀 파산신청 신세
북한이 공장 돌려 돈 많이 번답니다 공장 가동 시점이 다가왔다. 제품이 생산되면 석탄·아연 같은 지하자원으로 대금을 받아 남쪽으로 가져오기로 했다. 이 사장은 “7월부터 석탄이 내려오기로 했다. ‘에이급’으로, 열량 좋은 것으로 받기로 했다. 납품 약속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석탄은 오지 않았다. 5·24 조치로 평양 가는 길이 막혔다. 북쪽에선 계속 방북 초청장을 보내왔다. 간신히 개성에서 공장장 등과 만났다. 이 사장은 “곧 풀릴 거니까, 서로 참고 기다리자”고 했다. 벌써 6년 전이다. 이후 그의 삶은 여느 경협 기업인과 다르지 않다. 재산은 모두 경매로 넘어갔다. 담보로 잡힌 부동산도 날아갔다. 파산 신청도 해야 했다. “엊그제 경협 기업인들 송년회를 했는데, 회비가 2만원이었다. 그 돈도 없어 못내는 사람들이 있더라. 다들 기업하던 사람들인데….” 기막힌 세월이다. 얼마 전 이 사장은 중국 쪽을 통해 공장 소식을 탐문했다. ‘광명’(광명성총회사로 보임)이란 회사가 공장을 가동한다고 했다. 최근 몇년 새 평양에 아파트가 잔뜩 들어서는데, 이 사장의 공장에서 생산한 스테인레스 파이프를 팔아 돈을 많이 벌고 있단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경수 다물아트 사장
시계 이어 수제맥주 사업권까지
우리 매장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해
8년 세월 기다리다…촛불을 듭니다 관광 초기, 입점 경쟁이 엄청났다. 전 사장은 대형 서점에서 금강산 관련 책을 모조리 사들여 읽고 또 읽었다. 조각가에게 맡겨 인조 대리석을 금강산 모양으로 깎고, 수작업으로 색칠을 했다. 그렇게 만든 시계를 들고 금강호에 입점했다. 2003년 9월1일 육로 관광길도 열렸다. 기존 인프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현지 매장으로 자리를 옮긴 전 사장도 2006년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경쟁도 치열해졌다. 4평짜리 매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4명이 함께 10억원을 투자해 신규 법인을 만들었다.” 어렵사리 수제 맥주 브랜드 ‘오버스트 하우스’ 사업권을 따냈다. 전 사장은 남쪽 사업을 모두 접고 금강산에 다 걸었다. 2008년 봄부터 매출이 올랐다. 팬션·콘도 등 숙소도 대폭 늘었고, 골프장도 개장을 앞두고 있었다. 식자재며 기념품이며 상품을 최대한 준비했다. 미리 갖다 놓지 않으면 통관 등에 시간이 걸려 물건이 동날 수 있어서다. 2008년 7월11일 그가 남쪽에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박왕자씨 피격) 소식을 듣고 바로 금강산으로 올라갔다. 그 이전에도 인명사고가 있던 터라 문을 닫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두어달 중단됐다가, 성수기인 가을엔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기다렸다. 정부도 ‘잠정중단’이라 했지, ‘폐쇄’라고 하지 않았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서너차례 금강산에서 열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8년여를 살아왔다. 요즘 전 사장은 촛불을 든다. 독감이 심했던 7차 때를 빼고, 10월29일 1차 촛불집회 때부터 빠지지 않는다. ‘2018년 봄’까지 아예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촛불 가득한 광장에서 희망을 키우고 있다. 전 사장은 “(금강산 관광을) 열려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 열 수 있다. 인력과 자재를 집중 투입하면 한달이면 충분하다”고 힘을 주었다. ■ 2016년 12월28일 세밑 칼바람이 광장을 휘몰아친다. 내륙경협기업과 금강산기업인들이 꾸린 남북경협기업비상대책위원회는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12월28일로 86일째 천막농성 중이다. 개성공단영업기업비상대책위원회도 12월6일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무기한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쪽은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상태다. 대리인을 맡은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 김광길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국민의 재산권을 수용·제한하면서도 적법한 절차(긴급명령 발동)를 거치지 않았고,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아 재산권 보장 의무를 저버렸다. 어떠한 경우에도 개성공단 폐쇄는 없다던 남북합의서를 위반한 것은 신뢰 보호의 원칙에 반한다.” 100만개의 촛불이 모여 광장을 데우고 있다. 기상청은 12월28일 낮 서울의 체감기온이 영하 7도라고 전했다. ‘봄’은 언제쯤 올까?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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