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오후 전북 무주 설천면 태권도원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연맹(WTF) 주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남·북한 시범단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맨 오른쪽 제외)이 남쪽 시범단, 뒷줄이 북쪽 시범단. 무주/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전북 무주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내년 평창 겨울올림픽의 남북 단일팀 구성을 제의한 것은 ‘비정치적 이슈’인 스포츠 교류를 통해 새 정부 들어서도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북한의 반응 및 단일팀 성사 여부에 따라 ‘대화의 문’이 열릴지 주목된다.
문 대통령의 단일팀 제안은 남북대화와 협력의 마중물이 절실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달 10일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남북은 여전히 대화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대를 모았던 6·15 공동행사는 남북간 이견을 좁히지 못해 남북이 따로 개별행사로 치러야 했고, 남쪽 민간단체의 접촉 제안은 북쪽의 거부로 대부분 성사되지 못했다. 문 대통령이 체육교류라는 우회로를 택한 것은, 전통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를 만들어온 대북 인도적 지원이 예전에 비해 효과가 떨어진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예전에 비해 ‘긴급구호’ 등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데다 자칫 ‘퍼주기 논란’이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 정치외교 무대에서 사이가 껄끄러운 나라들이 체육 교류를 앞세워 분위기를 조성한 뒤 본격 관계개선에 나서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1970년대 초반 미국-중국 간 ‘핑퐁 외교’가 1979년 정식 수교의 가교 구실을 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례다. 남북간에도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와 리스본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단일팀 구성 등 체육 교류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정치·군사 분야의 협력으로 이어졌다. 문 대통령이 개막식에서 밝힌 바람대로, 오는 9월 평양에서 열리는 국제태권도연맹(ITF) 대회에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WTF) 시범단의 답방이 성사된다면 태권도를 고리로 남북이 자연스럽게 왕래하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평창올림픽 단일팀 구성이 논의될 경우, 이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주선 또는 중재로 이뤄지는 절차를 밟게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간 행사보다 국제사회의 관심과 호응,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더 유리하다. 강력한 대북제재 국면에서 남북교류의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정부에 우호적인 국제여론은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더구나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장이 분단과 통일의 경험이 있는 독일인이어서, 상대적으로 남북간 대화와 협력에 협조적일 가능성도 높다. 실제 남북 단일팀 구성 논의가 속도를 내게 되면, 이를 구실로 남·북의 고위 인사들이 서로 교환방문을 하면서 공개·비공개 협의를 할 기회가 많아지고, 이는 남북관계 복원에 적지 않은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북한의 태도다.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당장 속단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은 25일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의 단일팀 제안에 대해 “북한에서 최종 엔트리가 결정나는 것을 봐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고 안 의원이 전했다. 장웅 위원은 앞서 지난 23일 김포공항 입국장에서도 기자들이 올림픽 단일팀 구성 등에 대해 묻자 “나는 논의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당장 호응하는 모양새는 아니다. 즉답을 피하는 신중한 반응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단일팀 구성에 부정적이라고 단정하긴 이르다. 남북대화는 대체로 초기 의제 선점 과정에서 “쉬운 것, 비정치적인 것부터 교류하자”는 남쪽 입장과 “정치·군사적인 당면 과제부터 해결하자”는 북쪽 입장이 맞부딪히곤 했다. 북한은 지난달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민간교류는 거부한 채 △한·미 합동군사연습 중지 △삐라 살포 중지 △중국 식당 집단탈출 여종업원 송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 장웅 위원의 신중한 반응에는 이처럼 남북간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국면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은 “지금은 북한이 문재인 정부의 남북대화 의지와 의도 등을 떠보는 일종의 ‘간보기’ 국면”이라고 규정했다. 김 원장은 “북한이 내년 2월 평창올림픽까지 시간이 있기 때문에 당장 가부를 결정하기보다는 우선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지켜본 뒤 문재인 정부의 향후 움직임을 주시하며 태도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며 “앞으로 8·15 광복절 경축사와 10·4 남북공동선언 10돌 행사 등 향후 중요 일정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도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수 이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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