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6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기로 한 남북 고위급회담을 ‘중지’(연기)한다고 남쪽에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언급한 이유에는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함께 ‘인간쓰레기들의 놀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의 최근 행보를 문제 삼은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태 전 공사는 14일 국회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 안전 보장'은 결국 김일성 가문의 세습통치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북핵을 완전히 폐기하려면 군사적 옵션이나 국가적 경제 제재를 밀어붙이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등 북한 체제와 비핵화 의지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조선중앙통신>(중통)의 16일 새벽 ‘공화국을 반대하는 대규모의 련합공중훈련을 벌려놓은 미국과 남조선당국을 규탄’ 보도를 보면 “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 마당에 내세워 우리의 최고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 선언을 비방중상하는 놀음도 버젓이 감행하게 방치해놓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날 북쪽이 남쪽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부분 가운데 하나로, 이는 지난 14일 태 전 공사의 기자간담회 발언 내용 등을 지목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통>은 이어 “선의를 베푸는 데도 정도가 있고 기회를 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썼다.
태 전 공사는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미-북 정상회담과 남북관계 전망’을 주제로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주관한 강연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 안전 보장'은 결국 김일성 가문의 세습통치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핵 폐기 과정이 북한의 절대권력 구조를 허무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북-미 정상회담에서 ‘진정한 핵 폐기’에 기초한 합의가 나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가장 민감해하는 ‘최고존엄’과 ‘북한 체제’를 모두 건드린 것이다.
태 전 공사는 이어 “시브이아이디(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 핵폐기, CVID)는 (국제사회의) 강제 사찰, 무작위 접근이 핵심”이라며 “이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려면 북한이 붕괴한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면서 “(북-미 정상은) 시브이아이디가 아닌 에스브이아이디(충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 핵폐기, sufficient,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ing), 즉 핵 위협을 감소시키는 핵 군축으로 갈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남은 선택은 ‘핵 있는 평화', 핵 있는 북한과 공존하는 방향으로 점점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후 이어진 ‘3층 서기실의 암호-태영호 증언'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도 “김 위원장은 지난달 20일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핵무기가 ‘강력한 보검'이자 ‘확고한 담보'라고 말했다”면서 “이것을 내려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당시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이 위대한 승리로 결속”됐다면서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것이 당의 (새로운) 전략적 노선”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가 전략의 핵심을 ‘핵’에서 ‘경제’로 바꾼다고 공식 선포한 것이다. 하지만 태 전 공사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뺀 채 핵에 대한 김 위원장의 ‘표현’만 언급했다.
<중통>이 이날 태 전 공사를 빗대 ‘인간쓰레기’라고 한 것은 그가 북한 체제와 현재 김 위원장이 4·27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완전한 비핵화’ 등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데 대한 대응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이 우리 국내정치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직 안 된다는 게 드러난 것”이라면서 “북한이 우리 내부에 대해 염두에 두는 부분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정부에 주어진 과제 중 하나다. 그 차원에서 북한을 설득하는 작업과 함께 우리 내부 합의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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