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비핵화 기싸움
북핵 ‘리비아식 해법’ 또 강조
회담 앞두고 북한 심기 건들어
2003년 김정일에 “폭군” 비난
20여년 북한과 악연 ‘슈퍼 매파’ 북한이 16일 “격분을 금할 수 없다”며 내놓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문에는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이름이 세 차례 등장한다. 담화문의 대부분은 볼턴 보좌관이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주장한 대북 메시지를 명확히 겨누고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 이어 도널 트럼프 행정부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슈퍼 매파’ 볼턴 보좌관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에 변수로 떠오른 모습이다. 북한과 볼턴 보좌관의 악연은 200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군축·국제안보담당 차관과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지낼 때부터 대표적 강경파(네오콘)로 꼽혔다. 그는 차관 시절이던 2003년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을 “폭군 같은 독재자”라고 비난했고, 당시 북한은 “인간 쓰레기, 피에 주린 흡혈귀”라고 되쐈다. 김계관 부상이 담화에서 “우리는 이미 볼튼(볼턴)이 어떤 자인지를 명백히 밝힌 바 있으며, 지금도 그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고 밝힌 건 이런 전적을 가리킨다. 김 부상은 또 “지난 기간 조미(북-미) 대화가 진행될 때마다 볼튼과 같은 자들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과거사를 망각하고 사이비 우국지사들의 말을 따른다면…(생략)”이라고 경고했다. 이 또한 2000년대 초반 북핵 6자회담 시절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볼턴 보좌관은 국무부 차관이던 2004년 리비아의 핵 관련 장비를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옮기는 일을 주도했는데, 당시 6자회담 멤버는 아니었지만 “북한은 리비아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당시 6자회담 북쪽 수석대표가 김 부상이었다.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2002년 부시 행정부가 파기하는 과정 또한 볼턴 당시 차관이 주도했다. 볼턴 보좌관은 지난 3월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기 직전까지도 대북 선제 공격을 주장하는 등 매파 기질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임명 직후에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얘기했던 것들은 이제 다 지나간 일”이라고 했지만 지난 13일 “북한 핵무기를 테네시주로 가져가야 한다”며 리비아 모델을 또 입에 올렸다. 서로 뻔히 아는 14년 전 레코드를 또 돌려 북한의 반발을 부른 것이다.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6자회담 대표지낸 외교 전문가
과거 볼턴과 상대하며 각 세워
북, 상징적 인물통해 미에 경고
‘행동 대 행동’ 원칙 강조한 듯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등 북핵 관련 협상에서 완강하게 미국을 상대했던 외교일꾼이다. 그가 협상장에서 미국 대표들과 맞서는 동안 미국의 대통령은 빌 클린턴에서 조지 부시로, 다시 버락 오바마로 바뀌었다. 그만큼 북-미 핵협상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다. 그의 협상 전략은 북핵 폐기 과정을 잘게 쪼개는, 이른바 ‘살라미 전술’과 ‘행동 대 행동 원칙’을 통해 단계별 보상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북한이 지금도 강조하는 ‘단계적, 동시적 조처’에 입각한 접근법을 시종일관 내세웠다. 김 부상은 이 과정에서 미국의 경수로 제공, 평화적 핵이용 권리 인정, 마카오 은행 비디에이(BDA)에 대한 금융제재 해제 등을 관철시켰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말한 ‘불충분한 협상’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6자회담에서 채택한 ‘9·19 공동성명’이나 ‘2·13 합의’ ‘10·3 합의’를 보면, 북한이 주장하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이 깔려 있다. 북한은 2003년 제1차 6자회담을 앞두고 당시 ‘네오콘’의 대표적 인물인 볼턴 국무부 차관이 미국의 수석대표로 나오는 것을 극히 꺼렸다. 볼턴 차관이 나오면 상종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미국은 부시 대통령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결정할 사항이라고 맞섰으나, 볼턴 차관은 끝내 협상장에 나오지 못했다. 김 부상은 그의 불참이 확인된 2차 6자회담부터 북한의 수석대표로 나섰다. 그러나 볼턴 차관은 협상장 밖에서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고, 김 부상은 그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김 부상은 한동안 북핵 외교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고령인데다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 때문에 그의 이번 담화가 이름을 빌린 것일 뿐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의 이름에 담긴 상징성을 통해 미국에 대한 경고의 무게를 강조했다는 분석이다. 볼턴 차관이 당시 협상장 밖에서 미국의 강경한 입장을 대변했다면, 이번엔 김 부상이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강문 선임기자 moon@hani.co.kr
이슈한반도 평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