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트럼프, 오전 10시 ‘세기의 정상회담’
케네디 “벼랑보다 정상이 낫다” 소련 만났듯
북-미 70년 적대 끝낼 담대한 합의 나올까
케네디 “벼랑보다 정상이 낫다” 소련 만났듯
북-미 70년 적대 끝낼 담대한 합의 나올까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오후 싱가포르 센토사섬으로 이어진 도로가 보이고 있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카펠라호텔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 다리를 통해야만 한다. 싱가포르/연합뉴스
지난해 한반도를 벼랑끝 몰고 간
두 적대국 지도자가 마주앉는다 케네디 “벼랑보다 정상이 낫다”
대통령 취임 첫해 미·소 정상회담
1960년대 ‘데탕트’ 밑돌로 작용 미, 북에 “악의 축” “깡패국가” 비난
북핵 문제는 적대관계의 부산물
냉전 해체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70년 적대 끝 만나는 북·미 정상에
비핵화·체제안전보장 합의 바란다 미국은 1948년 38선 남쪽 지역에서 치러진 총선을 계기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이자 한반도 전역에 관할권을 지닌 국제법적 실체로 못박으려 했다. 미국의 이런 구상이 담긴 유엔 결의안 초안은, 하지만 유엔임시조선(한국)위원회의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캐나다의 반대로 무산됐다. 유엔 총회는 1948년 12월12일 결의 제195호(Ⅲ)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1948년 5월10일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또는 38선 이남)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한정했다. 당시 미국의 의도대로 북한의 존재가 전면 부인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북한을 휴전선 이북의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중국·소련과 한국의 수교는 어려웠을 터. 남북한 유엔 동시·분리 가입이나 북-일 교섭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엔 결의 195호는 남북한 유엔 가입과 북-일 교섭의 국제법적 근거였다. 존재 부인은 ‘더 나쁜 일’을 불러오는 악마의 주문이다. ‘타자 인정’은 협상·화해·공존·평화의 전제다. ‘타자 인정’ 여부는 역사를 전혀 다른 길로 안내한다. 미국은 북한을 아주 오래도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 세계가 탈냉전의 새 시대로 질주할 때, 유독 동북아시아에선 이른바 ‘북한 핵 문제’라 불리는 북-미 적대관계의 질적 악화가 돌출한 배경이다. 1990년 9월2~4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한국과 수교 방침을 통보하려고 방북했을 때,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 “쏘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조쏘동맹조약을 스스로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때까지 동맹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북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1990년 9월19일). 소련의 핵우산이 사라지면 자체 핵억제력을 확보하려 나설 수밖에 없다는 통보이자 절규였다. ‘핵억제력 확보’ 운운에 질겁하기보다 동북아 역내 질서 급변을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시 북한은 고립되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일본과 “국교관계 수립 협상”을 합의(‘조일관계에 관한 조선로동당,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의 공동선언’, 1990년 9월28일)했다. 한-소 수교 발표 이틀 전이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 부시’ 미국 정부는 ‘핵 문제’를 이유로 일본의 대북 접근을 가로막았다. 북한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1991년 9월17일)→남북기본합의서(1991년 12월13일)→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년 12월31일) 등을 통해 생존의 혈로를 뚫으려 했다. 결과는 ‘고립무원’이었다. 남쪽은 소련(1990년 9월30일)에 이어 중국(1992년 8월24일)과도 수교하며 대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북은 미국은 물론 일본과도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북핵 문제’를 북-미 적대관계의 부산물로 규정하고,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큰 그림 속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만약 1990년대 초반 한-소, 한-중 수교와 병행해 북-미, 북-일 수교가 이뤄졌다면, 한반도·동북아가 21세기의 두번째 십년에도 탈냉전 세계 질서에서 뒤처져 ‘냉전의 외딴섬’으로 남아 서로 갈등하는 일은 없었을 터이다. 이른바 ‘북핵 위기’는 동북아 네트워크의 ‘미싱 링크’(missing link: 빠진 고리)인 북-미, 북-일 사이에 쌓인 스트레스의 발작적 폭발이다. 관계 부재는 위험하다. 이 점에서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는 새롭게 조망돼야 한다. 북·미의 오랜 적대사에서 최초의 ‘정부 간 합의’라는 점에서, 핵 동결 합의를 넘어선다. 존재 인정은 새 길을 여는 안내자다. 제네바 기본합의의 미국 쪽 주체인 빌 클린턴 행정부 때 북·미 양국이 한국전쟁 종식 논의 필요성을 인정(북-미 공동 코뮈니케, 2000년 10월12일)하고,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한 건 우연이 아니다. 21세기의 이른바 ‘2차 북핵 위기’도 북한을 ‘악의 축’ ‘깡패국가’(rouge state)라고 비난하며 존재 자체를 부인한 ‘아들 부시’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불거졌다. 그때도 미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정상회담(2002년 9월, 2004년 5월)을 하며 북-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핵 문제’를 이유로 주저앉혔다.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머물고 있는 싱가포르 세인트 리지스 호텔 인근 거리에서 한 기자가 현지 신문에 실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 관련 특집 기사를 읽고 있다. 싱가포르/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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