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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센토사’ 이름처럼…70년 적대 끝낼 그날이 밝았다

등록 2018-06-12 04:59수정 2018-06-12 11:39

김정은-트럼프, 오전 10시 ‘세기의 정상회담’
케네디 “벼랑보다 정상이 낫다” 소련 만났듯
북-미 70년 적대 끝낼 담대한 합의 나올까
“벼랑에서 만나는 것보다 정상에서 만나는 게 훨씬 더 좋다.”

존 에프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 1959년 10월1일 한 말이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59년 9월 미국을 방문했으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지 못하고 돌아간 직후다. 케네디는 ‘소련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냉전이 열전으로 악화하는 걸 정상회담이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래서다.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 첫해인 1961년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흐루쇼프와 사상 첫 미-소 정상회담을 했다. 이 첫 만남은 당장의 성과는 없었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 데탕트(긴장 완화)와 잦은 미-소 정상회담의 밑돌이 됐다.

‘벼랑보다 정상이 낫다’는 케네디의 조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아메리카합중국(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세기의 회담’을 할 12일 아침에 되새기기에 좋은 말이다. 2017년 “화염과 분노”, “괌도 주변 포위사격” 운운으로 한반도를 전쟁 위기의 벼랑 끝까지 몰고 간 두 ‘적성국’의 최고지도자가 ‘벼랑보다 훨씬 좋은’ 정상에서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두 정상은 오전 9시(한국시각 오전 10시)부터 통역만 배석시킨 채 전쟁에서 평화로 가는 역사적 이정표를 세울 ‘일대일’ 담판에 나선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는 건, 그 속내가 무엇이든, ‘북한 인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북-미 관계의 본질을 바꿀 동력이 될 수 있다.

북-미 70년사는 ‘인정받으려는 자’와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의 전쟁 같은 숨바꼭질이었다. 미국은 애초부터 북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오후 싱가포르 센토사섬으로 이어진 도로가 보이고 있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카펠라호텔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 다리를 통해야만 한다. 싱가포르/연합뉴스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오후 싱가포르 센토사섬으로 이어진 도로가 보이고 있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카펠라호텔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 다리를 통해야만 한다. 싱가포르/연합뉴스

“화염과 분노” “괌 주변 포위사격”
지난해 한반도를 벼랑끝 몰고 간
두 적대국 지도자가 마주앉는다

케네디 “벼랑보다 정상이 낫다”
대통령 취임 첫해 미·소 정상회담
1960년대 ‘데탕트’ 밑돌로 작용

미, 북에 “악의 축” “깡패국가” 비난
북핵 문제는 적대관계의 부산물
냉전 해체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70년 적대 끝 만나는 북·미 정상에
비핵화·체제안전보장 합의 바란다

미국은 1948년 38선 남쪽 지역에서 치러진 총선을 계기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이자 한반도 전역에 관할권을 지닌 국제법적 실체로 못박으려 했다. 미국의 이런 구상이 담긴 유엔 결의안 초안은, 하지만 유엔임시조선(한국)위원회의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캐나다의 반대로 무산됐다. 유엔 총회는 1948년 12월12일 결의 제195호(Ⅲ)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1948년 5월10일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또는 38선 이남)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한정했다.

당시 미국의 의도대로 북한의 존재가 전면 부인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북한을 휴전선 이북의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중국·소련과 한국의 수교는 어려웠을 터. 남북한 유엔 동시·분리 가입이나 북-일 교섭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엔 결의 195호는 남북한 유엔 가입과 북-일 교섭의 국제법적 근거였다.

존재 부인은 ‘더 나쁜 일’을 불러오는 악마의 주문이다. ‘타자 인정’은 협상·화해·공존·평화의 전제다. ‘타자 인정’ 여부는 역사를 전혀 다른 길로 안내한다.

미국은 북한을 아주 오래도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 세계가 탈냉전의 새 시대로 질주할 때, 유독 동북아시아에선 이른바 ‘북한 핵 문제’라 불리는 북-미 적대관계의 질적 악화가 돌출한 배경이다.

1990년 9월2~4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한국과 수교 방침을 통보하려고 방북했을 때,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 “쏘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조쏘동맹조약을 스스로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때까지 동맹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북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1990년 9월19일). 소련의 핵우산이 사라지면 자체 핵억제력을 확보하려 나설 수밖에 없다는 통보이자 절규였다. ‘핵억제력 확보’ 운운에 질겁하기보다 동북아 역내 질서 급변을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시 북한은 고립되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일본과 “국교관계 수립 협상”을 합의(‘조일관계에 관한 조선로동당,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의 공동선언’, 1990년 9월28일)했다. 한-소 수교 발표 이틀 전이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 부시’ 미국 정부는 ‘핵 문제’를 이유로 일본의 대북 접근을 가로막았다. 북한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1991년 9월17일)→남북기본합의서(1991년 12월13일)→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년 12월31일) 등을 통해 생존의 혈로를 뚫으려 했다. 결과는 ‘고립무원’이었다. 남쪽은 소련(1990년 9월30일)에 이어 중국(1992년 8월24일)과도 수교하며 대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북은 미국은 물론 일본과도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북핵 문제’를 북-미 적대관계의 부산물로 규정하고,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큰 그림 속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만약 1990년대 초반 한-소, 한-중 수교와 병행해 북-미, 북-일 수교가 이뤄졌다면, 한반도·동북아가 21세기의 두번째 십년에도 탈냉전 세계 질서에서 뒤처져 ‘냉전의 외딴섬’으로 남아 서로 갈등하는 일은 없었을 터이다. 이른바 ‘북핵 위기’는 동북아 네트워크의 ‘미싱 링크’(missing link: 빠진 고리)인 북-미, 북-일 사이에 쌓인 스트레스의 발작적 폭발이다. 관계 부재는 위험하다.

이 점에서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는 새롭게 조망돼야 한다. 북·미의 오랜 적대사에서 최초의 ‘정부 간 합의’라는 점에서, 핵 동결 합의를 넘어선다. 존재 인정은 새 길을 여는 안내자다. 제네바 기본합의의 미국 쪽 주체인 빌 클린턴 행정부 때 북·미 양국이 한국전쟁 종식 논의 필요성을 인정(북-미 공동 코뮈니케, 2000년 10월12일)하고,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한 건 우연이 아니다.

21세기의 이른바 ‘2차 북핵 위기’도 북한을 ‘악의 축’ ‘깡패국가’(rouge state)라고 비난하며 존재 자체를 부인한 ‘아들 부시’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불거졌다. 그때도 미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정상회담(2002년 9월, 2004년 5월)을 하며 북-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핵 문제’를 이유로 주저앉혔다.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머물고 있는 싱가포르 세인트 리지스 호텔 인근 거리에서 한 기자가 현지 신문에 실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 관련 특집 기사를 읽고 있다. 싱가포르/로이터 연합뉴스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머물고 있는 싱가포르 세인트 리지스 호텔 인근 거리에서 한 기자가 현지 신문에 실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 관련 특집 기사를 읽고 있다. 싱가포르/로이터 연합뉴스
북-미 적대는, 현시점에서 동북아 냉전 지속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러므로 ‘김정은-트럼프 회담’의 성사는 그 자체로 한반도·동북아 평화의 중대한 진일보다.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핵심 요소인 미국의 ‘북한 인정’, 북-미 공존을 향한 협상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70년 적성국 최고지도자의 첫 만남 장소가 ‘센토사’(Sentosa)인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섬의 원래 이름은 ‘풀라우 블라캉 마티’(Pulau Belakang Mati), ‘죽음(이후)의 섬’이다. 1972년 ‘평화와 고요’를 뜻하는 ‘센토사’로 바뀌었다. ‘죽음’에서 ‘평화’로,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아주 좋지 않은가.

북-미 관계가 풀리면 북-일 관계 정상화는, 역사가 웅변하는바, ‘식은 죽 먹기’다. 그러면 동북아는 ‘미싱 링크’가 없는 네트워크가 된다. 북한은 ‘고립국가’에서 벗어나 해양으로 나갈 수 있고, 남한은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 화해·협력·공존하는 남과 북의 한반도는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가교이자 허브가 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신경제 구상’,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일대일로’ 구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신동방정책’이 동북아에서 서로 엮이지 못하고 겉돌 일도 더는 없다. 문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성사·성공을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 곧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필수 통과점이라 거듭 강조해온 까닭이다. 그리고 동북아의 화해협력과 경제협력 활성화, 곧 탈냉전은 세계 경제와 세계 평화의 중대 진전이다.

북-미 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의 말마따나,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크다. 더구나 미국과 중국 사이 패권 다툼이 ‘창’(일대일로 구상)과 ‘방패’(인도·태평양 전략)의 불꽃 튀는 쟁투로 치닫는 와중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대륙의 단일 지상 강국이 유라시아 땅덩어리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조지 케넌,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을 제1원칙으로 한 패권 전략을 고수해왔다. 미국이 태평양·대서양 건너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을 무너뜨리고 냉전기엔 소련, 21세기엔 중국을 전략적 봉쇄·견제 대상으로 삼은 까닭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동북아를 오랜 세월 짓눌러온 이런 역사구조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까? ‘비핵화-체제안전보장’ 맞교환의 실마리를 찾아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을까? 아무도 자신하지 못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이 요즘 들어 부쩍 “기도하는 심정”을 읊는 까닭이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52년째 이어진 콜롬비아 내전을 끝낼 평화회담을 주선하며 내전 당사자들과 세계인한테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는 또 실패할 권한이 없다.” 한반도의 ‘전쟁’은 69년째 끝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실패했다. 더는 실패하지 말자. 담대하게 상상하고 지혜롭게 실천하자. 일단은 교황의 호소가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한테 잘 전해지도록 모두의 마음을 모으는 일부터!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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