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 북한대사관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평양 정상회담 사진으로 외부 게시판을 가득 채웠다. 기존에 걸려 있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사진은 사라졌다. 30일 중국 베이징 북한대사관 정문 옆 대형 게시판에 게시된 25장의 평양 남북정상회담 사진을 한 베이징 시민이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29일(현지시각) 제73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열쇳말은 ‘신뢰’와 ‘평화’였다. ‘경제’ ‘비핵화’ ‘제재’도 자주 입에 올렸다. 이 다섯 단어의 연결망에 리 외무상이 강조하려는 ‘북한 대외전략의 기조’가 담겨 있다.
1100단어 남짓한 15분의 연설에서 리 외무상은 ‘신뢰’를 12차례, ‘불신’을 5회 언급했다. 둘을 더하면 ‘평화’를 언급한 횟수(17차례)와 같다. 북한의 대외전략 기조에서 (북-미 간) ‘신뢰’는 (한반도) ‘평화’와 거의 같은 무게라는 얘기다. 리 외무상이 ‘경제’를 7차례나 입에 올린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비핵화’를 언급한 횟수(7차례)와 같다.
우선 리 외무상은, 4·20 노동당 중앙위 7기 3차 전원회의에서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노선 종료를 선언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 집중’을 ‘새 전략노선’으로 채택한 사실을 상기시키고는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평화적 환경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한 뒤 지금껏 고수해온 경제와 안보의 상관관계에 대한 인식과 판박이다. 북한이 4·20 노동당 전원회의 이전에는 한번도 공개적으로 구사한 적이 없는 논법이다. ‘지금 당장 (경제 발전을 위해) 평화가 절박하다’는 메시지는 국제사회가 주목할 만하다.
이어 리 외무상은 “(6·12) 조-미 공동성명을 철저히 이행하는 것”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조-미 공동성명을 철저히 이행하려는 공화국 정부의 입장은 확고부동”한데 “미국의 상응하는 화답을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며 “(미국의) 제재가 우리의 불신을 증폭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그는 “조선반도 비핵화도 신뢰 조성을 앞세우는 데 기본을 두고 평화체제 구축과 동시 행동 원칙에서 단계적으로 실현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비핵화와 상응조처의 ‘균형·동시·단계적 실천’이라는 공식 방침의 재확인이다. “미국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가의 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일방적으로 먼저 핵무장을 해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선긋기는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
이와 관련해 “만일 비핵화 문제의 당사자가 미국이 아니라 남조선이었다면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도 지금 같은 교착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언급이 눈에 띈다. 70년 분단사에 전례없는 언급인데,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가교가 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눈물겨운 노력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자 미국의 대북 불신을 겨냥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리 외무상은 북쪽이 바라는 주요 상응조처도 에둘러 밝혔다. “미국은 제재 압박 도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종전선언 발표까지 반대하고 있다”는 지적이 그렇다. ‘제재’ 관련 언급은,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나 대미 협상 책임자인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등 북쪽의 고위 인사가 지금껏 한번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아 왔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다만 리 외무상은 ‘미국은 ~을 해야 한다’는 식의 직접적 요구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숱한 제재 결의를 쏟아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지만 그 (핵시험과 로켓) 시험(발사)이 중지된 지 1년이 되는 오늘까지 제재 결의는 해제되거나 완화되기는커녕 토 하나 변한 것이 없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유엔 안보리가 제재 완화·해제 결의를 추진할 것을 촉구하는 간접 화법이다.
전직 고위 관계자는 “리 외무상의 연설은 북한의 대외전략 기조를 밝히는 것으로 물밑에서 진행되는 북-미 협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며 “제재 언급도 지금 당장 그걸 풀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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