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시대’ 넘은 3인 행적 재조명
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다. 그해 봄과 여름 황석영 작가(3월20일), 임수경 한국외대 학생(6월30일), 문규현 신부(7월25일)가 연이어 방북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들의 방북을 ‘밀입북’으로 규정하고 ‘이적행위’로 처벌했다. 정부만 대북 접촉을 할 수 있는 창구단일화론이 정답인 시대였다. 북한 사람과 접촉 시도를 하기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이들의 방북을 두고 국내에서 격렬한 찬반 논쟁이 일었다. ‘통일 논의와 교류협력의 물꼬를 민간으로도 돌렸다’와 ‘밀입북해 북한에 치우친 이적행위를 했다’는 주장이 맞섰다. 민간방북 30년이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 문익환 목사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문익환 목사가 1989년 첫날 새벽에 단숨에 쓴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앞 대목이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독재를 이어받은 노태우 정부였다. 정부 허가 없이 민간인이 북한을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때였다. 사람들은 ‘올해 안에 평양에 가겠다’는 문 목사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잠꼬대로 취급했다. 그러나 문 목사에겐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었다.
문 목사는 1970년대 이전까지 한신대 교수로, 성서 번역에 주력했다. 70년대 전태일과 장준하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말만 하지 않고 온몸으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했다.
1988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조국통일운동이 뜨거웠다. 문 목사는 직접 북한 당국자를 만나 남한의 통일 열기를 전달하고, 북한의 통일 방안을 듣기 위해 평양에 갔다. 그는 3월2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도착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왔습니다.”
문 목사가 일본을 거쳐 4월13일 김포공항에 돌아오자 바로 수감됐다. 국가보안법상 지령수수, 잠입탈출, 회합통신, 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법정에서 “마음대로 구형하고 마음대로 언도하십시오. 여기서는 유죄를 받고 역사에서는 무죄를 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3년 3월 사면됐다. 문 목사는 1994년 1월 숨졌고 200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문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아 최근 사단법인 통일맞이는 ‘문익환 목사 1989년 방북 명예회복 선언’ 서명 운동을 펴고 있다. 통일맞이는 “남북 화해와 협력의 밑거름이 된 문익환 목사의 명예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묻는다. “30년 전 ‘통일의 물꼬’를 트고자 방북한 문익환 목사에게 씌워진 ‘밀입북’과 ‘이적행위’에 대해 이 시대의 양심에게 묻고자 합니다. 아직도 문익환은 유죄입니까?”
먼저 통일맞이는 ‘밀입북’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1989년 1월30일 북쪽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 명의의 초청장을 정부로부터 대신 전달받고, 2월4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자격으로 ‘초청 수락 성명서’를 공개 발표한 후 3월25일 방북했으니 ‘밀입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고 문익환 목사 ‘잠꼬대 아닌 잠꼬대’
단숨에 써내려간 시처럼 북으로
“가슴과 눈으로 대화하러 왔다”
통일맞이, 문 목사 명예회복 운동
“아직도 문익환은 유죄입니까” 분단고착 뒤 첫 방북 작가 황석영
다섯 번 방북 일곱 번 김 주석 만나
귀국 뒤 5년간 투옥 혹독한 대가
수감 중 ‘사람이 살고 있었네’ 방북기
붉은 도깨비 아닌 평범한 사람 담아 평양축전 참가 ‘통일의 꽃’ 임수경
유라시아 대륙 왕복해 평양으로
당당한 언행에 북쪽도 문화충격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 내려와
군사분계선 넘자마자 붙잡혀 옥고 통일맞이는 “김일성 주석과 회담해 ‘무력 통일’이 아닌 ‘점진적 통일 방안’에 합의하여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의 기초를 만들고, ‘정치군사적 문제 해결 우선’을 고집하던 북쪽을 설득하여 ‘사회문화 교류의 병행’을 약속받아 2007년 10·4 정상선언의 밑거름이 된 문 목사의 방북 행적 어디에 ‘이적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문 목사는 두차례 김 주석을 만났고 허담 조평통 위원장과 4·2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에게 “북쪽이 주장하는 통일을 이루자면 부지하세월입니다”라며 연방제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고 했다. 이 주장은 2000년 6·15 공동선언 제2조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로 이어졌다. 통일맞이가 지난 3월30일 서울 중구 을지로 한 건물에서 연 ‘민간방북 30돌 기념행사’ 참가자들은 “30년 전 문 목사가 선취하여 삶으로 꾼 꿈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고 밝혔다. ■ 황석영 방북,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황석영 작가는 문 목사 방북 닷새 전인 1989년 3월20일 북한 땅을 밟았다. 88년 노태우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민간교류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7·7선언’을 발표했다. 군사독재정권은 위기에 처하면 북한과 엮은 공안사건을 만들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곤 했다. 재야에서는 ‘남북 민간교류 주도권마저 정부에 넘겨선 안 된다’는 걱정이 나왔다. 황석영 작가(당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가 방북하면 유명 작가를 간첩으로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황석영 작가는 북한문학예술동맹의 초청장을 받아 ‘문화예술교류'를 위해 방북했다. 그는 분단 고착 이후 북쪽에 들어간 최초의 남쪽 작가였다. 그는 방북 뒤 바로 귀국하지 않고 4년간 외국에 머물면서 다섯번 북한에 들어갔고, 일곱번 김일성 주석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목사는 평양을 떠나는 날, 황 작가에게 “다 돌아가서 차례차례 굴비 엮듯이 잡혀가지 말고 황형은 밖에서 활동을 좀 해라. 기행문 쓰고도 해외에서 활동을 하면서 연대 틀을 만들어줘라”는 부탁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을 떠나 독일 베를린, 미국 뉴욕 등에서 지냈다. 1993년 4월 귀국해 7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5년 했다. 수감 중 <사람이 살고 있었네>란 제목의 방북기를 펴냈다. 그는 방북기에서 북한도 우리와 별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당연하지만 당시로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뿔 달린 붉은 도깨비들이 사는 곳쯤으로 여기던 북한에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이 살고 있고 평범한 일상이 존재한다고 전했다. 공안당국은 이 방북기를 이적표현물로 봤다. 1989년 겨울호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게재한 <창작과 비평> 이시영 주간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 임수경 전대협 대표, 평양축전 참가
1989년 6월21일 한국외대 4학년 임수경씨가 서울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일본 도쿄와 독일을 거쳐 6월30일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유라시아 대륙을 왕복해 서울에서 평양에 갔다. 그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평축)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했다. 분단 이후 남쪽의 학생 대표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큰 충격을 줬다. 통일운동가나 유명 작가가 아닌 평범한 20대 대학생의 방북은 남북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임수경씨는 평양에서 ‘통일의 꽃’으로 불리며 환영을 받았다. 그가 가는 곳에는 환영 인파가 자발적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임씨는 연설을 요청받으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한다. 북한 대학생은 당의 지침을 충실히 따라야 해서 당시 북한 대학생 사이에서는 “남조선 대학생이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데 우리는 뭐냐”란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의 자유분방한 언행이 북한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줬다고 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문규현 신부를 북쪽에 보내 천주교 신자인 임수경씨와 동행하게 했다. 노태우 정부가 잇단 밀입북이 공개적으로 국가보안법과 휴전협정을 무시해 사회 혼란을 조성하고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며 공안 정국을 조성해 대응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27일 판문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유엔사의 불허 등에 막혀 남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8월15일 임수경씨 등이 판문점 북쪽에 나타났다. 이들은 15분간 연설을 한 뒤 걸어 내려왔다.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는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에서 남으로 온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바로 붙잡혔다. 1심에서 임수경씨에게는 징역 10년, 문규현 신부에게는 징역 8년이 선고됐다.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지령 수수, 잠입탈출, 고무찬양 혐의 등이 적용됐다. 항소심에선 두 사람 다 징역 5년이었다. 92년 성탄절 전야에 두 사람은 석방됐다.
지난해 4월27일 오전 9시30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오자 문재인 대통령은 “저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그럼, 지금 넘어가볼까요”라고 대답하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 북으로 잠시 넘어갔다가 다시 남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4월 남북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기에 앞서 여러 사람의 시도가 있었다. 당시는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중국 작가 루쉰은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 교류협력도 길과 같다.
89년 민간방북은 90년대 이후 경제, 언론, 학술, 예술 등 북한과의 다양한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방북했다. 이후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등으로 이어졌다. 정치·군사 위주 당국대화에 견줘 민간교류협력은 남북이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었고, 경색국면을 푸는 실마리 구실을 해왔다. 활발하던 남북간 교류협력은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막히고 시작해, 천안함 사건 뒤 2010년 5·24 조처로 민간교류협력이 중단됐다.
지난해 4·27 판문점선언 이후 남북 당국간 관계는 회복됐지만, 정부는 ‘질서있는 남북관계 관리’를 내세워 대북지원을 포함한 민간 교류협력에는 신중한 태도다. 대북제재에 막혀 남북교류협력은 논의만 무성하고 뚜렷한 성과는 못내고 있다. 60여 단체로 꾸려진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는 지난 11월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에 대북 인도적 지원을 제재 예외로 인정해달라는 서한을 보냈지만, 여전히 대북 인도적 지원이 어려운 상황이다. 4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한반도 상황에 대한 시민사회단체 입장 발표 외신기자회견’에서 홍상영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국장은 인도적 지원에 대한 대북 제재 해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문익환 목사가 방북해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고 있다. 통일맞이 누리집
단숨에 써내려간 시처럼 북으로
“가슴과 눈으로 대화하러 왔다”
통일맞이, 문 목사 명예회복 운동
“아직도 문익환은 유죄입니까” 분단고착 뒤 첫 방북 작가 황석영
다섯 번 방북 일곱 번 김 주석 만나
귀국 뒤 5년간 투옥 혹독한 대가
수감 중 ‘사람이 살고 있었네’ 방북기
붉은 도깨비 아닌 평범한 사람 담아 평양축전 참가 ‘통일의 꽃’ 임수경
유라시아 대륙 왕복해 평양으로
당당한 언행에 북쪽도 문화충격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 내려와
군사분계선 넘자마자 붙잡혀 옥고 통일맞이는 “김일성 주석과 회담해 ‘무력 통일’이 아닌 ‘점진적 통일 방안’에 합의하여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의 기초를 만들고, ‘정치군사적 문제 해결 우선’을 고집하던 북쪽을 설득하여 ‘사회문화 교류의 병행’을 약속받아 2007년 10·4 정상선언의 밑거름이 된 문 목사의 방북 행적 어디에 ‘이적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문 목사는 두차례 김 주석을 만났고 허담 조평통 위원장과 4·2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에게 “북쪽이 주장하는 통일을 이루자면 부지하세월입니다”라며 연방제를 너무 고집하지 말라고 했다. 이 주장은 2000년 6·15 공동선언 제2조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로 이어졌다. 통일맞이가 지난 3월30일 서울 중구 을지로 한 건물에서 연 ‘민간방북 30돌 기념행사’ 참가자들은 “30년 전 문 목사가 선취하여 삶으로 꾼 꿈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고 밝혔다. ■ 황석영 방북,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황석영 작가는 문 목사 방북 닷새 전인 1989년 3월20일 북한 땅을 밟았다. 88년 노태우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민간교류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7·7선언’을 발표했다. 군사독재정권은 위기에 처하면 북한과 엮은 공안사건을 만들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곤 했다. 재야에서는 ‘남북 민간교류 주도권마저 정부에 넘겨선 안 된다’는 걱정이 나왔다. 황석영 작가(당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가 방북하면 유명 작가를 간첩으로 조작할 수는 없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황석영 작가는 북한문학예술동맹의 초청장을 받아 ‘문화예술교류'를 위해 방북했다. 그는 분단 고착 이후 북쪽에 들어간 최초의 남쪽 작가였다. 그는 방북 뒤 바로 귀국하지 않고 4년간 외국에 머물면서 다섯번 북한에 들어갔고, 일곱번 김일성 주석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목사는 평양을 떠나는 날, 황 작가에게 “다 돌아가서 차례차례 굴비 엮듯이 잡혀가지 말고 황형은 밖에서 활동을 좀 해라. 기행문 쓰고도 해외에서 활동을 하면서 연대 틀을 만들어줘라”는 부탁을 전했다고 한다.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있었네>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와 판문점 분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조선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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