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실패 직후 베트남 하노이에서 심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왼쪽). 2019년 3월1일.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 독립기념일인 4일 북한 당국이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와 “(2017년 7월4일)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시험 발사 성공” 3년에 맞춘 <노동신문> 특집기사를 내놨다.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의 한국 방문(7~9일)을 사흘 앞두고다.
북쪽은 ‘최선희 담화’로 “미국과 마주 앉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화성-14형 발사 성공’을 “7·4혁명”이라 부른 <노동신문> 특집에선 1~3면에 걸쳐 12건의 기사를 쏟아내면서도 미국을 향한 비난이나 적개심 고취를 주의깊게 피했다.
‘화성-14형’은 북한의 장거리 로켓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당시 <조선중앙통신> 기사 제목은 “반제반미 대결전에서 이룩한 주체조선의 위대한 승리”였다.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제와의 기나긴 대결이 드디어 마지막 최후계선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이에 비춰 미국을 향한 비난과 적개심을 촉구하지 않은 <노동신문> 특집은 의미심장하다.
‘최선희 담화’는 일반 인민이 접근할 수 없는 <조선중앙통신>으로 공표하고 <노동신문>엔 싣지 않았다. ‘외부용’이다. 반면 <노동신문> 특집은 ‘내부용’이다. 이 기사가 ‘대미 압박용’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기사의 초점이 ‘대미 적대·비난’이 아닌 “정면돌파전의 기본전선”인 경제 분야의 “자력갱생” 촉구에 맞춰진 사실이 더 눈길을 끈다.
‘최선희 담화’는 “삭막하게 잊혀져 가던 ‘조미수뇌회담’이라는 말이 며칠전부터 화제에 오르면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정이 어떻든 북-미 정상회담이 또다시 ‘국제적 관심사’로 떠올랐다는 북한 당국의 공식 반응이다. 다만 “조미관계의 현 실태를 무시한 수뇌회담설이 여론화되고 있는 데 아연함을 금할 수 없다”는 싸늘한 반응이다. “이미 이룩된 수뇌회담 합의도 안중에 없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는 미국과 과연 대화나 거래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아연함’의 이유다. 그러고는 “미국이 아직도 협상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며 “조미대화를 저들의 정치적 위기를 다루어 나가기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미국과는 마주 앉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최선희 담화’의 북-미 대화 거부는 무조건적·전면적이지 않다. “적대시 정책”을 문제삼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도구’로서의 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쪽에 가깝다. “양쪽이 가고 싶어한다고 믿는 방향으로 실질적 진전을 이뤄낼 시간이 아직 있다고 믿는다”는 비건 특별대표를 향해 ‘우선 만나자’는 식의 ‘대화를 위한 대화’에는 응할 생각이 없다는 답변이다. 말이 아닌 ‘행동’의 촉구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행동이 없는 말은 의미가 없다”며, 작더라도 미국의 협상 의지를 담은 ‘실천’의 필요성을 환기했다.
2017년 7월 4일 ‘화성-14형’ 시험 발사 당시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노동신문> 특집기사는 “(화성-14형을 개발한) 국방과학전사들처럼 불굴의 정신력과 창조력을 총폭발시켜 나간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지금이야말로 자력부강, 자력번영의 대업을 성취해나갈 책임적인 시기”라며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기치를 더 높이 추켜들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신문은 “개발창조형 공업” “전사회적으로 (이윤과 손실 등) 숫자를 중시하는 기풍” “지역별, 부문별, 단위별 사회주의 경쟁” 따위를 호소했다. <노동신문>은 5일치에서도 코로나19에 대응한 ‘국가적 비상방역’ 강화와 평양종합병원 건설을 독려하는 사설을 1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김정은 위원장의 핵심 관심사를 드러내는 지점이자, ‘한반도평화과정’ 재추진의 잠재적 동력이 놓인 자리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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