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중국은 한반도 사드보다는 훨씬 더 위중한 안보 사안인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악화시킨 필리핀과 대화 모드로 돌아섰다. 필리핀이 이 문제에서 막나가지 않겠다고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사드 문제에서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한국이 중국에 신호를 줄 차례다.
박근혜 대통령이 4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기지를 성주군 내 새 지역으로 배치하는 걸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3부지는 불가능하다는 국방부도 즉각 이를 수용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가 사드 덫에서 출구를 모색한다고 생각했다.
제3부지론은 타당성이나 현실 가능성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사드 배치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끼여버린 한국에 외교적 시간과 공간을 열어줄 한 방안으로 봐야 한다. 현재 상황은 사드 배치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정부가 발표한 이상, 이를 당장 뒤집을 수 없고 그러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한-미 관계가 한-중 관계보다도 훨씬 친밀한 군사동맹 관계라는 것을 중국 자신도 잘 안다. 이런 한국이 사드 배치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중국이 모를 리 없다. 그런 중국이 정부의 사드 배치 발표 이후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한국에 타협을 요구하는 거로 봐야 한다. 중국 쪽이 한국에 전례 없는 비판과 비난을 퍼붓는다고 하나, 잘 살펴보면 이는 민간 쪽 반응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박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고는 하나, <인민일보>는 공식적으로는 언론일 뿐이지 당국이 아니다.
사드 배치 발표 이후 중국 당국이 한국을 겨냥한 비판은 왕이 외교부장이 거의 유일하다. 그는 7월24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 때 열린 한-중 외교장관회담에서 “한국 쪽의 행위는 쌍방의 신뢰에 해를 끼쳤다. 유감이다”라며 “한국 쪽이 우리 관계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실질적인 행동을 취할지 들어보려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방점은 ‘우리 관계를 수호하기 위한 한국 쪽의 행동’에 있다.
사드 문제가 커진 것은 중국이 가장 큰 전략적 이해를 갖는 남중국해 문제가 꼬일 때 터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제 상설중재재판소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와 관련한 필리핀의 제소에 손을 들어줬고, 미국 쪽은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에 불리한 판결이 예상되던 와중에 한국이 덜컥 사드 배치까지 발표했다.
중국에는 한반도의 사드보다는 남중국해 영유권이 훨씬 더 급박하고 위중한 안보 사안이다. 그리고 영토 문제는 국제관계에서 가장 양보하기 힘든 문제다. 하지만 중국은 지금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을 특사로 보낸 필리핀과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 모드로 돌아섰다. 필리핀이 먼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가 아니라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라며 골치 아프나 중국과 전쟁할 문제가 아니라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신임 대통령의 한마디가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두 나라 사이 영유권 문제의 본질이 바뀔 수는 없다. 그래서 두 나라가 취할 수 있는 최대치는 상대방이 막나가지 않겠다는 것을 확인하는 거다. 즉 분쟁 사안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합의하는 거다.
사드 문제도 마찬가지다. 배치 강행이냐 취소냐는 본질을 다투면 해법이 없다. 중국은 자신의 이해가 걸린 사드 문제에서 상대방이 막나가지 않게 개입을 원한다. 한국이 중국을 자극했으니, 이제 한국이 먼저 손을 내밀 차례다. 필리핀이 국제재판소에 제소하고 승소한 뒤 중국에 손을 내민 것과 같은 이치다.
제3부지론은 우리가 중국에 주는 성의가 될 수 있다. 제3부지론을 공론화하고 추진하는 동안 우리는 중국과 대화할 시간을 벌 수 있다. 한국과의 외교 최전방에 있던 한 미국 당국자는 이번 사드 배치는 한국이 하자고 해서 한 것이라며, 미국도 놀랐다는 말을 전했다. 미국 역시 성주 주민들이 저렇게 극렬히 반대하는 사드의 성주 배치를 그대로 밀어붙여, 우리 정부를 곤경에 빠지게 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정부가 제3부지론을 꺼내놓고 그 후 보인 행보는 실망스럽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중국 당국을 비판하고, 국내의 사드 반대 여론을 사대론, 매국노로 헐뜯었다. 당국자를 통한 비판에 신중한 중국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정부와 청와대의 강경 입장이 중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포석이라면,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제3부지론도 좋고, 다른 것도 좋다. 중국에 사드 문제가 관리 가능한 수준이 될 수 있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 현명한 외교라면, 국내의 사드 찬반양론을 자산으로 미국과 중국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미국이나 중국과 등지고 살 수 없는 것처럼 두 나라도 우리를 버릴 수 없다.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