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갈루치 전 미 북핵대사가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북핵문제 해결과 동아시아 평화공존 등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장은 미국 정부가 조건없는 협상을 했으면 좋겠다. 고위급 회담이면 더욱 좋겠다. 협상을 시작하고, 이제는 모든 이가 도발적인 이야기를 그만했으면 한다.”
1993년 3월 북한의 일방적인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촉발된 제1차 북핵 위기는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해소됐다.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북-미가 수교를 하고, 미국 등이 북한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게 뼈대였다. 그로부터 23년여가 흘렀지만, 북핵 위기에 따른 한반도 안보 상황은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차 북핵 위기 이후 사라졌던 ‘선제타격론’이 다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게 이런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대사가 16일 오후 서울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대화’와 ‘협상’을 새삼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갈루치 전 대사는 이날 강연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에둘러 비판했다. 그는 “미국이 대화 시작에 대한 조건을 달았다. 북한이 일종의 ‘진실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라며 “(대화는)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양쪽이 (진정한)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북) 제재를 반대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지금으로선) 강경한 제재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제재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북-미 대화의 방식에 대해 갈루치 전 대사는 “북한이 원하는 어젠다(안건)를 인정하고 협상을 시작하길 바란다. 틸러슨 국무장관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전제 조건 없이 회담을 시작하면 좋겠다”며 “전술적으로 트랙 1(당국 대 당국), 트랙 2(민간 대 민간) 이런 식으로 (투트랙으로) 나눠서 대화하는 것도 좋다. 차관보나 국무장관 급에서 협상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지난달 3일 6차 핵실험 실시 이후에도 북한은 ‘국가 핵무력 완성’을 내세우며, 추가적인 핵·미사일 도발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이에 대해 갈루치 전 대사는 “아무래도 현재로선 (북한이) 협상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짚었다. 그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아이시비엠)에 대해 (능력을) 보여주고 난 뒤에야, (북한의 아이시비엠 위협에) 미국이 취약하다는 걸 보여주고 나서야 북한이 대화에 나설 것 같다”고 내다봤다.
앞서 갈루치 전 대사는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비공개 대화를 나눴다. 그는 ‘문 대통령에게 어떤 조언을 했느냐’는 청중의 질문에 “한국 대통령이 북한에 손을 내민 것으로 안다. 북이 (대화에) 나오기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다”며 “핵·미사일 문제는 미국도 (대화에) 참여해야 하는 안보문제지만, 한국 쪽에선 어떤 주제에서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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