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총리관저에서 사임의 뜻을 밝히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연합뉴스
독특한 역사수정주의를 내세우며 한-일 관계를 격랑 속으로 몰고 갔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으로 7년8개월에 걸친 긴 집권을 끝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상 최악’이라 평가되는 한-일 관계의 미래에도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되지만, 근본적인 개선이 이뤄지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28일 오후 5시부터 1시간에 걸쳐 사임 기자회견을 열면서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남기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가 해결하지 못해 ‘통한의 극치’란 표현을 사용한 3대 과제는 자신이 필생의 과업이라 거듭 언급해온 개헌과 일본인 납치 문제, 러시아와 평화조약 체결(쿠릴열도 남단의 섬 4개에 대한 러-일 영토 갈등 해결)이었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 지도자들이 이전과 달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담할 때 납치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다”며 자신의 성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 이름을 짧게 거론하는 데 그쳤다. 일본 기자들도 한-일 관계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이는 아베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과 코로나19 위기 대응 등으로 한국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아졌음을 방증한다.
앞으로 한-일 관계에 생길 변화는, 누가 아베 총리의 뒤를 이어 차기 총리 자리에 오르느냐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차기 총리와 관련된 민감한 질문엔 “내가 언급할 문제가 아니다”, “당 집행부에 모든 것을 일임했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엔에이치케이>(NHK) 등 일본 언론들은 아베 총리가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에게 후임 총재 선거의 방식과 일정에 대해 일임했다”며 “다음달 1일 열리는 당 총무회에서 정식으로 결정 내리는 방향으로 조정될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일본은 자민당이 중의원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어, 자민당 총재가 자동으로 총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현재 한-일 갈등의 핵심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등에 대한 양국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달라, 차기 총리가 타협적인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해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에 한국이 조기에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해왔다.
아베 총리는 이날 “한 사람의 의원으로 계속 활동하겠다. 여러 정책 과제 실현을 위해 미력을 다하겠다”며 총리 사임이 곧 정계 은퇴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특히 ‘단장(장이 끊어질 듯한)의 마음’이란 표현까지 쓴 개헌과 관련해선 “유감스럽게도 국민적 여론이 충분히 고조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이후에도 “한명의 국회의원으로 (개헌 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강민석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아베 총리의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 정부는 새로 선출될 일본 총리와 새 내각과도 한-일 간 우호·협력 관계 증진을 위해 계속해서 협력해나갈 것”이란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길윤형 서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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