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리던 지난 26일, 구리시청 소년합창단 단원들이 요청했던 잠바와 담요를 거절당한 채 단복 하나만으로 추위 속에서 1시간 가량 떨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정치부 이승준 기자
합창단 초등학생들 단복만 입고 1시간 벌벌 떨어
“잠바, 담요 요청했지만 주최측 사진 찍히면 안된다며 거부”
<한겨레> 보도 이후, 현철씨·행자부 사과 뜻 밝혀
“잠바, 담요 요청했지만 주최측 사진 찍히면 안된다며 거부”
<한겨레> 보도 이후, 현철씨·행자부 사과 뜻 밝혀
“그날 아침 하늘은 기울었을 테고 친구들은 하나 둘 울었으리라
보고픈 엄마 아빨 불렀을 테고 어른들은 나직이 소리쳤었다
가만 가만 가만히 거기 있으라 가만 가만 가만히 거기 있으라
잊혀질 수 없으니 그리움도 어렵다
마음에도 못 있고 하늘에도 못 있다”
(▶이승환-가만히 있으라 중)
가수 이승환씨가 최근에 발표한 ‘가만히 있으라’ 라는 노래의 한 구절입니다. 노래에서는 사건이나 대상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4월16일을 추모하는 노래입니다. “가만히 거기 있으라”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이승환씨의 목소리를 최근에 듣고 있으려니 잊고 있던 그날이 떠오르며 마음에 찬바람이 붑니다.
26일 국회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저를 비롯해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어라’라고 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영결식이 열리던 26일 오후 2시 저는 코트 깃에 몸을 파묻고 영결식이 열리던 국회 잔디밭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영결식에 참석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하 3도의 추위에 눈발까지 날리니 야외에 앉아있는 모두들 두꺼운 코트와 목도리에 파묻혀 떨고 있었습니다. 핫팩을 손에 쥐고 있는 분들도 보였습니다. 유독 외투와 목도리가 없이 벌벌 떨던 50대 남성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그의 입은 추위에 굳었는지,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영결식이 시작되고 유족과 정치인들의 표정이 보고 싶어 무대 앞쪽으로 갔습니다. 근데 눈에 들어온 건 초등학생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열을 지어 앉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검은색 단복을 입고 있는 모습에 ‘그런가 보다’ 하고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그늘이 드리운 아이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부끄럽게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이 검은색 단복 하나만 입고 무릎에 흰색 천만 덮은 채 벌벌 떨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마음이 안 좋아 사진부터 찍었습니다. 더 가까이 가서 아이들의 표정을 포착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고 시선을 맞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영결식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바쁘게 이동하며 정치팀 게시판에 사진을 올렸습니다. 현장 분위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영결식 취재한다는 핑계로 바삐 움직이면서 아이들의 존재를 잊었습니다. 1시간 가까이 지나고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서 소리지르듯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뒤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또 “거기 가만히 있으라”라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정치팀 김남일 기자와 박현철 SNS팀장이 씁쓸한 현장을 포착해 한겨레 트위터·페이스북 계정에 전했습니다. 한 트위터리안은 한겨레 트위터 계정에 “인솔자와 학부모 모두 잠바와 담요를 요청했지만 주최 측에서 카메라에 잡히면 안된다는 이유로 몇 차례 거절하였고, 아이들은 행사가 끝나고 몸이 굳어 잘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라는 글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바로가기
많은 분들이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현하셨습니다. 27일 노컷뉴스에서 현장 영상을 공개해 아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동영상 보기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는 27일 밤 트위터를 통해 “아버님 영결식에 나온 어린이 합창단들이 갑자기 몰아닥친 영하의 추운 날씨에 떨었다는 소식에 유가족의 한사람으로서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세심한 배려가 부족한 결과가 어린 학생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사과의 뜻을 밝혔습니다.
김현철씨의 진정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상주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영결식을 총괄한 ‘행정자치부의 사과를 보고싶다”고 쓰고 싶었습니다. 뒤늦게 28일 오후 행정자치부 의정관 명의로 트위터에 “어린이 합창단에게 미처 추운 날씨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여 따뜻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것에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빠른 시간 내에 찾아 뵙고 직접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는 사과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한국 민주화의 한 축을 담당하셨던 김 전 대통령이 꿈꿨던 세상에는 아이들이 얇은 옷을 입고 2시간 가까이 추위와 싸워야 하는 현실이 포함돼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언제까지 아이들에게 “거기 가만히 있으라”라고만 할건가요? 저 역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반성합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같은 시간, 눈 내리는 영결식에 참석한 어른들은 두터운 외투와 담요, 장갑 등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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