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12월22일 전주시 덕진구 전북대학교 최명희홀에서 학생들과 타운홀 미팅을 하고 있다. 윤 후보는 이날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른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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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프랑스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레오폴 상고르는 “인권은 아침식사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단순하게 보면 이 말은 식량권이 보장되면 표현의 자유, 투표권, 사생활 보장 등의 권리도 따라온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주장은 소위 ‘부른 배 테제’(full belly thesis)라 불리며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식량권은 인권에 있어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이를 절대적 우선조건으로만 이해할 때 인권을 좁은 개념으로 받아들여 왜곡하기 쉽다. 나는 자주 강의 시간에 이 부른 배 테제라는 화두를 던진 후 이렇게 질문한다. 우선은 끼니 걱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된 후에 우리는 다른 권리를 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압도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때로는 확신에 차서 단호하게 ‘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질문을 조금 바꿔 본다. 그러면 우리 배를 불리면 그다음 인권이 차례대로 보장받게 되나요? 혹은 배부른 순서대로 인권을 보장받습니까? 사람들은 이내 혼란스러워한다.
실제로 식량권 보장이 저절로 시민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표현의 자유가 노동과 건강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공동체의 안전과 경제를 개선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권리의 우선순위가 아니라 권리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권리를 강화한다는 시각이 오늘날 더 인정받는다.
자유에 전제조건을 내거는 정치인
학력·경제력 바탕이란 위험한 발상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지난 22일 전북대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자유의 본질은 일정 수준의 교육과 기본적인 경제 역량이 있어야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교육과 경제(기반)의 기초를 만들어주는 게 자유의 필수적인 조건”이라 했다. 혹자는 “극빈층과 못 배운 사람들은 자유 뭔지 몰라”라고 뽑힌 언론의 제목만 보면 윤석열의 ‘자유론’을 오해할 수 있지만 맥락을 이해하면 사실은 진보의 주장이라는 말까지 한다.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 자유를 쟁취해온 투쟁의 주체를 배운 자로 국한시킨다. 교육받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만이 이 사회를 제대로 이끌 수 있다는 전형적인 엘리트 의식이다. ‘아래로부터’ 역사를 보지 않으면 노예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무학의 노예가 아니라 백인 지도층 남성을 기억하고, 지배층의 부패와 착취에 민란을 일으키는 민중이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개혁을 실행하는 정치인이나 지식인만 보게 된다.
자유는 인권의 중요한 요소다. 오해와 달리 자유에 대한 갈망은 배부름과 비례하지 않는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정의의 아이디어>에서 정확하게 말하듯이 “경제적 부유함과 본질적 자유는 서로 무관하지 않지만 자주 괴리될 수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2021년 국제통화기금의 자료에 따르면 1인당 국내총생산 규모로 볼 때 8위인 싱가포르는 (한국은 26위) 여전히 언론 자유가 위협받는 곳이다. 경제적 권리가 정치적·문화적 권리를 반드시 보장하지 않는 사례는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물론 경제와 시민의 자유는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의 ‘본질’은 아니며 경제력이 자유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인권침해적인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시각이 국가의 성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수많은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관행을 합리화해왔다. ‘그래도 경제는 살렸다’며 독재를 옹호하게 만든다. 이때 ‘경제는 살렸다’는 말은 어떤 사람들의 죽음을 사소하게 만든다. 경제 우선주의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 되기보다는 그들의 자유를 모른척하는 방향으로 가기 쉽다.
보수 진영에서 활용하는 자유의 개념은 형식적으로 볼 때 철저히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노동자에게 일할 자유”를 말하며 주 52시간 근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의 시간을 빼앗는 착취를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 둔갑시킨다. 윤 후보는 “최저임금보다 낮은 조건에서도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며 최저임금이 높아서 고용이 안 되는 것처럼 말했다. 물론 사람이 너무 절박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뭐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 절박함은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신체를 변형시키고 심지어는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일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것이 개인의 ‘선택’인가. 이것이 일할 ‘의사’인가. 저소득 계층을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면서 마치 개인의 주체적 선택인 양 호도한다. 이런 말들은 선택의 자유가 없는 사람들의 현실을 개인의 선택으로 위장한다. 빈곤 계층이 자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 계층에게는 자유를 행사할 선택지가 애초에 주어지지 않는 구조이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면서 그들이 자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왜곡한다.
쟁취의 역사, 엘리트주의로 축소뒤
가난한 이는 자유 필요없다 왜곡해
자유에 대한 문제적 인식을 드러낸 윤 후보의 발언은 차별금지법과 엔(n)번방 방지법을 두고 “자유를 침해하는” 법으로 가정한 청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동문서답 속에서 자유에 대한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누군가는 타인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무한대의 자유를 주장하는 한편, 누군가는 가난하다고 해서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흔히 저소득 계층이 ‘자유의 필요성을 모른다’는 관념은 ‘취향이 없다’는 편견으로도 이어진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수만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요구 사항을 조사했을 때 ‘두발 자유화’ 요구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임금 인상보다 두발 자유화를 더 갈망한 이 사례는 두고두고 생각할 지점이 많다. ‘모른다’와 ‘없다’라는 정의는 누군가의 자유와 취향을 외면하고픈 사람들의 입장이다. 과연 자유를 모르는 사람이 누구인가.
예술사회학자.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2020) <타락한 저항>(2019) 등의 저자.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평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비평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