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곤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23일 보건복지부에 29일까지 채워서 제출하라며 전달한 복지부 개방형 직위 공무원, 산하 공공기관장·임원 과거 활동 이력 작성 양식. 오영환 민주당 의원 제공
이달곤 국민의힘 의원이 최근 보건복지부에 개방형 직위 공무원들과 산하 공공기관장·임원들의 과거 활동 이력을 자세히 적어 제출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과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나 참여연대 등에서 활동했는지 여부와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피해 혹은 규탄 여부 등을 밝히라고 해, 벌써부터 ‘블랙리스트’ 작성을 통한 전 정권 인사 솎아내기가 시작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31일 오영환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 공개한 자료와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이 의원실은 지난 23일 복지부에 29일까지 정책보좌관, 개방형 직위, 기관장, 부기관장 및 임원 현황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이 의원실은 제출할 자료의 ‘양식’을 직접 만들어 첨부했는데, 이 양식을 보면 해당 공무원이나 기관장의 과거 활동을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적도록 했다. 임명권자가 누구인지, 과거 청와대·인수위·정부·공공기관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는지를 적도록 했고, 정당이나 국회 보좌진으로서 일한 경험, 선거 캠프 활동 및 선출직 경험 여부는 물론 특정 출마자를 지지 선언한 적이 있는지도 적게끔 했다.
양식에는 또 민변·참여연대·시민단체·언론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지 여부와, ‘국정농단(블랙리스트 사건 등) 피해 또는 규탄’이라는 항목도 있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다면 국민의힘 쪽 인사, 규탄했다면 민주당 쪽 인사라고 편의적으로 구분지으려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 의원실은 ‘작성 방법’까지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 의원실은 작성자가 임명된 날이 올 3월9일(대선 일) 이후일 경우 임명일을 적는 칸을 ‘노란색’으로 표시하라고 요구했다. 또 임기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공식 취임일인 5월10일을 기준으로 1년 이상 남았으면 ‘빨간색’으로 표시하라고도 했다. 과거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면, 마지막 직위만 적는 것이 아니라 ‘OO정부 청와대 행정관’이라고 표기하라고 예시까지 들었다.
자료 제출 요구를 받은 복지부는 해당 인사들의 공개된 과거 이력만 추려 이 의원실에 답변을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조직, 정당, 기관에서의 근무 이력을 넘어 시민사회단체 활동 이력이나 국정농단 때 처했던 상황 등은 해당 인사들에게 직접 묻는 것조차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빈 칸으로 남겨뒀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복지부를 제외한 다른 부처 중에 같은 자료 제출 요구를 받은 곳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이 의원실이 “블랙리스트 성격의 명단 제출을 요구한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당 정책조정회의에서 “공공기관에 알아서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을 솎아내라고 무언의 압박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취임 전부터 시작된 ‘윤석열판 블랙리스트’ 작성과 검찰 수사를 앞세운 정치보복이 인수위와 윤석열 당선인의 의중이 반영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법과 원칙을 늘 강조해온 윤석열 당선인은 국민의힘의 블랙리스트 작성 시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민변도 이날 성명을 통해 “이 의원이 정권교체 이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당사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깊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민변은 이어 이 의원에게 “정권교체시기에 갑작스럽게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려한 시도에 대한 책임 있는 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현재 활동 중인 인수위원회와 당선인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중대하게 인식하길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밝혔다.
논란이 일자 이 의원은 <한겨레>에 “보좌진이 현황 파악을 해보려고 요청한 자료로 제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며 “정부에 있어 봤기 때문에 인사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안다. 요구할 이유도 없었던 자료다. 의도도 전혀 없었다”고 거듭 해명했다.
최하얀 기자
chy@hani.co.kr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