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1일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및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출국에 앞서 서울공항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인사를 받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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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124)은 중국 한나라 때의 문인이다. 그는 독서를 폭넓게 해서 ‘관서의 공자’(關西孔子)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문명을 날렸다. 그가 동래지방 태수로 있을 때, 대장군 등척이 자신의 아들을 천거해 달라며 왕밀을 통해서 황금 열 냥의 거금을 뇌물로 가져왔다. 한밤중에 양진과 단둘이 만난 왕밀은 “한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며 뇌물을 받을 것을 권했다. 그러자 양진은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해서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느냐”(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라고 꾸짖으며 뇌물 받기를 거절하고 왕밀을 쫓아냈다.(<후한서> 중 ‘양진열전’)
양진은 그 뒤로도 어떤 권력자에게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나라의 폐단을 바로잡으라는 상소를 계속 올려 결국 벽지 지방관으로 거듭 좌천당했다. 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권귀들의 눈 밖에 나서 연거푸 탄핵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스스로 짐독을 먹고 자살함으로써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뇌물을 거절하면서 남긴 여덟 글자 ‘천지(天知),신지(神知),아지(我知),자지(子知)’는 오늘날까지도 천고의 명언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인간이 제아무리 은밀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은밀한 행위는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그 은밀한 행위의 당사자들이 알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의 행위는 없다는 발언이다.
최근 ‘하위무지’(何謂無知)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에서 “행안부에서는 (이태원 참사) 유족 전체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행안부 장관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에 대해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그럼 유족하고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냐”고 따지자, 이 장관은 오히려 “국무위원이 하는 말을 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자꾸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행안부에서는 명단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연락처는 물론이고요”라고 짜증 섞인 반응까지 내놨다. 하지만 무지 혹은 거짓말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조사 결과 행안부가 10월29일 참사 발생 이틀 만에 서울시로부터 희생자 명단뿐 아니라 유가족 정보까지 포함된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쪽은 “(유족 명단을 갖고 있었으면서 이를) 숨기려 했다면 그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고, 파악하지 못했다면 묵과할 수 없는 무능의 극치”라고 꼬집었다.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 과정에서 박희영 용산구청장의 후안무치한 거짓말도 국민들의 가슴을 치게 했다. 박 구청장은 참사 발생 뒤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 “핼러윈 행사가 주최 측이 없기 때문에 ‘축제’가 아닌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등의 말로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게다가 이태원 참사 경찰청 특별수사본부(특수본) 등의 조사에서 참사 이전에 두차례 이태원 현장 점검을 했다거나, 참사 당일 경남 의령군 집안 제사에 참석했던 것인데도 의령군 초청으로 지역 행사에 다녀왔다고 한 박 구청장의 주장은 고스란히 거짓으로 드러났다.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수사를 받는 박 구청장은 결국 지난달 15일 국민의힘 이태원 사고 조사 및 안전대책 특별위원회 위원들에게 “섣부른 해명으로 혼란을 드렸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에 앞서 지난 9월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도 빼놓을 수 없다.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난 뒤 혼잣말처럼 “국회에서 이 ××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중얼거렸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문화방송>(MBC)이 자막과 함께 이런 논란을 보도하자,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 발언에서 ‘국회’는 ‘미국 국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를 지칭한 것이고, ‘바이든’이라는 단어는 ‘날리면’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국민들로 하여금 이 동영상을 돌려 들으며, ‘듣기능력 평가’를 치르도록 만들었다. 이후 대응은 논란을 더 키웠다. 윤 대통령은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한다는 것은 국민을 굉장히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 먼저 이 부분에 대한 진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안도 앞서 얘기한 양진의 혜안을 빌리자면, 우선 행위 당사자는 명백하게 모를 수가 없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는지 명백히 알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어떤 말을 했는지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조선조 선비들의 심신 수양 입문서였던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은 똑같이 ‘신독’(愼獨, 혼자 있을 때 신중히 함)에서 출발해야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나 성실함(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자기 자신은 모를 수 없는 일을 두고, 스스로 정직하지 못하다면 자기 내면의 덕을 쌓을 수도 없고 사회적 성취도 이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도심(道心, 올바름을 따르려는 마음)에 깃들어 있으니 도심이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것은 한울님이 명하신 경계나 다를 바 없다. 남은 듣지 못하더라도 나만은 홀로 똑똑히 들으니 이보다 자세할 데 없고 이보다 엄격할 데 없는데, 가르치듯 깨우쳐 주듯 하니, 어찌 그저 차근차근 타이를 따름이겠는가.”(정약용, <중용자잠>) 어떤 은밀한 인간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의 당사자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밖에 없다. 자기 마음속에서 이 일이 떳떳하지 못하고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이 바로 한울님의 가르침이자 경고인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정치 지도자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들이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더 큰 그릇의 사람이 될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 과오를 그럴듯하게 꾸미는 소인배가 아니라, 자기반성을 통해 마음그릇을 키워갈 수 있는 군자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철학연구자
연세대에서 주역 연구로 석사, 제자백가 논리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겨레> 기자를 거쳐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등을 지냈다. 제자백가 사상과 철학을 강의하고 글쓰기를 하고 있다. <아큐를 위한 변명> <한비자, 권력의 기술>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