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불출마 선언 회견을 하려고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을 찾은 고건 전 총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 기자회견장에 내리려다 지지자들이 앞을 막아서자 눈을 감은 채 착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 물체는 고 전 총리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머리 위로 치켜든 사진기자들의 플래시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외부인사 진입벽 낮아져…새로운 전환점 될 수도
고건 전 국무총리가 16일 “오늘부터 정치활동을 접기로 했다”며 17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권은 지지율 5%를 넘는 유력 대선 주자가 한 사람도 없는 보기 드문 상황을 맞게 됐다. 고 전 총리의 포기로 여권의 대선 구도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은 물론, 전체 대선 판도에도 중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고 전 총리의 낙마는 무엇보다 ‘반한나라당’ 지지층을 묶어내는 구심점의 일시적 와해를 부를 수 있다. 난파 직전의 상황에 내몰린 여권을 이끌 ‘외부 선장’으로 기대를 모았던 그의 퇴장으로 여권의 혼돈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대선 주자 진공상태에 빠진 여권은 대안을 찾는 데 부심할 것으로 보인다. 재집권의 한가닥 희망이라도 보여주려면 어느 정도 국민 지지를 받는 대선 주자를 창출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선택은 두 가지다. 정치권 밖의 또다른 외부 인사를 물색하거나, 아니면 정치권 내부의 기존 인사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다. 지리멸렬 상태인 여권으로선 양쪽 다 어려운 숙제다.
고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으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비롯한 외부 인사들의 정치권 진입 벽은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안에선 고 전 총리의 중도사퇴를 계기로, ‘권력 의지’가 불투명한 외부 인사에 대한 회의론도 나온다. 한때 지지율 30%가 넘었던 고 전 총리조차 허망하게 무너지는 터에, 권력의 생리를 모르고 정당 기반이 미약한 외부 인사들이 냉혹한 대선 과정을 견뎌낼 수 있겠느냐는 논리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 천정배 의원 등 당내 예비주자들에겐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 특히 호남 출신인 정동영·천정배 두 사람은 전환점을 맞을 수도 있다. 고 전 총리에게 쏠렸던 호남 민심이 대안으로 두 사람을 검토하면 지지율이 반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고위 당직자는 “고 전 총리 낙마 이후, 여권 대선 구도의 최대 변수는 호남의 민심 추이”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를 지지했던 호남 민심이 당분간 부동층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전체적으로, 고 전 총리의 퇴장은 여권 재집권 전략의 기본 구도를 흔들면서 재집권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여권이 역전의 발판으로 기대해 온 ‘완전 국민경선제’(오픈 프라이머리)의 효과가 반감될 수 있는 탓이다.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고건이라는 디딤돌이 사라진 점은 여권에 크나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외부 인사든 당내 인사든 완전 국민경선제에서 고건과 겨루면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데, 그 가능성이 현저히 약화됐다는 얘기다. 반면에 한나라당의 ‘이명박-박근혜 싸움’은 더욱 불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여권에서 논의돼 온, 신당 창당과 정계 개편을 둘러싼 논란도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여권 지지율 1위 주자의 퇴장으로, 밖에서 끌어당기는 원심력이 약화됨으로써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탈당 움직임이 일시적으론 주춤해질 수밖에 없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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