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이 좌절됐다.
3년여를 끌어왔으나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가 가세한 열린우리당의 국민연금법 개정안과 한나라당의 수정 동의안이 모두 부결된 것이다.
법 논리상으로는 다음 회기에 국회에 개정안을 다시 제출하면 되나 제출 명분이 약한 데다 보건복지위→법사위→본회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 과정, 대선.총선 일정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현 정부 임기내에서 연금 개혁은 실패한 셈이다.
이에 따라 국회가 정치적 이해 관계 등에 의해 시급히 처리해야 할 중요한 정책 결정을 방기했다는 비난 여론이 뜨겁다.
◇ 왜 무산됐나 =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섰다는 게 중론이다. 당장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표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작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에서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더 내고 덜 받는' 쪽의 연금 개혁을 주장했다가 손해를 봤다는 `교훈'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외견상으로는 기초연금제 도입 여부를 둘러싼 대립이 뇌관이 됐다. 한나라당과 민노당은 연금 급여의 10% 수준의 기초연금제 도입안을 내놨다.
반면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을 통해 노령연금이라는 명목으로 연금 급여의 5% 급여안을 고수했다. 한나라당 안대로라면 재정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재원이 소요된다는 이유에서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나라당은 충분한 재원대책을 고려하면서 전반적인 사회복지 제도의 개편과 연계해 책임성 있고 신중하게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넉넉하게 잡아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에서 충당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결국 이 같은 견해 차가 엇갈려 연금 개혁이 좌초했지만 대선을 8개월여 앞두고 `정책 전초전'을 벌였다는 인상이 농후하다. 대선 당락의 향배를 쥐고 있는 노인표를 최대한 유입하려는 데만 주력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대목이다.
◇ 앞으로 어떻게 되나 = 사실상 현 정부 임기내 연금 개혁은 물건너 갔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다시 추진한다면 그 진원지는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될 것이나 이번에 부결된 연금법 개정안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와 함께 설령 다음 회기에 개정안을 다시 제출하려 해도 국회내 논의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거쳐야 하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다.
복지부 내에서는 "연금 개혁을 사실상 접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묻어 나온다.
당장 올 12월에 대선이 있고 그 다음해에 총선이 있다. 당이고 의원이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이 시급하다. 실제 연금 개혁 방안을 다시 추진한다고 해도 선거를 앞두고 투명하고 성실한 논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부와 열린우리당 일각에서는 재추진 각오도 묻어 나온다. 한나라당이 `몽니'를 부렸다는 부정적 인식에서다.
◇ 심각한 후유증 = 현행 연금 체계로는 2047년이 되면 기금이 고갈된다.
1988년 연금 설계 당시 너무 후하게 짜여져, 이대로라면 조기 기금 고갈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각 정당이 `더 내고 덜 받는' 구조로의 개편을 모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이 급속한 고령사회화가 진행되고 있는 사정을 감안하면 연금 고갈 시기는 더욱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현(現) 세대가 후(後) 세대의 희생을 토대로 노후 보장을 받는 것과 다름없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을 둘러싼 `세대 전쟁'을 우려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는 60세가 넘는 연금 수급자가 유족연금을 받게 될 경우에 지금까지는 한 개만 선택해 받도록 돼 있던 것을 고쳐 유족연금은 20%를 받도록 하되 나머지 연금은 전액 수령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제도적 개선책도 지연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것들에는 유족연금의 `남편 차별' 조항과 연금 감액조항 삭제, 분할연금 확대 지급, 다자녀 가구 및 군복무자에 대한 연금 가입기간 추가 인정 등이 있다. 연금 개정안 처리가 지연되면 지연될 수록 가입자가 손해 볼 수 밖에 없는 셈이다.
노인철 전 국민연금연구원 원장은 "이번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정치 논리로 무산돼 아쉽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넘어갈 것"이라며 "국회의원들이 무책임한 처사를 했지만 연금의 재정안정화 등을 위해 제도 개선이 불가피한 만큼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 다시 연금 개혁의 고삐를 다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욱 기자 hjw@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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