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대선 광고
[대선후보 리더십검증]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①
‘샐러리맨 신화’의 두 모습 ‘추진력 vs 무모함’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인생 역정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샐러리맨 신화’ 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후보가 ‘건설맨’으로 뛴 27년의 세월은 그의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가늠케하는 바로미터와 같은 것이다. 초고속 승진의 화려한 이력 뒷면에 자리한 ‘기업가 이명박’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 해결사인가, 마름인가=정주영과 이명박은 일하는 스타일에서 서로 통했다. 이명박이 68~69년 중기사업소에서 일할 당시 일이다. 중장비를 다루는 인부들이 부품값을 과다 청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명박은 트랙터를 분해해 재조립하면서 기계의 원리를 죄다 습득해 엉뚱한 비용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정주영 회장이 젊은 시절 쌀가게 배달원으로 일할 때 사흘 밤낮으로 자전거타기를 연습한 끝에 쌀 서말을 싣고도 거뜬하게 달렸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론보다는 현실적인 사고를 하고, 이를 쉬운 말로 표현했다는 점도 정 회장의 마음에 들었다. 이 후보와 함께 일했던 ㄱ씨는 “가령 사장단 회의에서 정 회장이 ‘자재창고 책임자로 누가 좋으냐’고 물으면, 다른 간부들은 ‘자재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있고 수치 관리에 능한 사람’이라고 답했지만, 이명박은 ‘술 안먹고 담배 안 피는 사람을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기억한다. 자재를 빼돌리지 않고 불조심을 하는 사람이 가장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정 회장은 이 후보가 회사의 궂은 일을 몸바쳐 처리하는 ‘해결사’로서의 능력을 높이 쳤다고 한다. 중역 출신의 ㄴ씨는 “78년 압구정동 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으로 정몽구 사장이 구속됐을 때도 수습하러 뛰어다녔고, 80년 신군부 때는 현대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국보위를 드나들며 협상을 벌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이명박이 현대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황제’로 군림한 정 회장의 ‘마름’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ㄷ씨는 “이명박은 자기가 잘한 일이 있어도 모두 정 회장 공으로 돌렸다. 처세에 매우 능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ㄹ씨는 “이 후보는 정 회장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줄 알았다. 정 회장이 적적할 때는 불러서 마음을 달랠 정도로 의지했다”고 말했다.
■ 효율, 속도, 통제=공장 안에 ‘더 빨리’란 표어가 붙어있던 시절, 그의 능력의 요체는 ‘신속정확’이었다. ㄱ씨는 “미흡한 점이 있으면 다른 간부들은 ‘좀더 연구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이명박은 ‘내일 아침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본인 스스로 ‘원없이 일했다’고 말하듯, 그는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다잡았다. 입사 3년차였던 중기사업소 과장 때에도, 직원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출근시간을 아침 7시에서 6시로 앞당겨 맨손체조·구보를 시켰다. 여성 직원들이 화장을 해야하니 출근시간을 아침 6시30분으로 30분 늦춰달라고 하자, 그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일찍 퇴근하니 밤에 화장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대꾸했다고 한다. ㅁ씨는 “당시 현대건설은 빨간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로 365일 돌아가는 회사였다”고 말했다. 사무실에 의자를 놓지 않고 종일 설계판 앞에 서서 일하는 독일의 엔지니어링 회사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해야 오전·오후 30분씩의 휴식을 꿀맛같이 느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토요일에 출근하는 사원들이 캐주얼 차림으로 출근하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퇴근 후에 놀러가려는 복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영두 연구위원은 “생산 시스템이 단순하던 시절엔 상사가 부하들에게 모범을 보임으로써 물불 안 가리고 일하게 만들거나 초과근무를 시키는 것이 효율적이었다”며 “그러나 지금의 달라진 사회 환경에서 관료주의적 통제를 기반으로 한 강제적 리더십은 잘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작 본인은 정 회장으로부터 파격적인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아랫사람들에겐 인색했다는 평가도 있다. 아랫사람들에게 전폭적인 권한을 맡겼지만 그들의 경력 관리엔 소홀했다. ㅁ씨는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 CEO 자질이 엿보이는 후배들 중 불이익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다”며 “다른 계열사로 발령내거나 조기 퇴직까지 유도해 일찌감치 잠재적 라이벌의 싹을 잘라버렸다”고 말했다. ■ 불도저와 무모함 사이=‘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99%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이 후보의 신념이다. 좋게 말하면 적극성, 저돌성이지만, 뒤집어보면 아무리 리스크가 높아도 일단 뛰어들고 보는 무모함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 ‘무용담’으로 내세우는 이라크 공사 수주는 그런 모험주의 노선의 실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이명박은 우리나라와 외교관계가 맺어지지 않았던 이라크에 “첩보영화의 주인공처럼 상륙했다.” “젊은 혁명가를 좋아하는 한 인간이 동쪽 먼나라에서 왔다”며 간곡히 면담 신청을 한 끝에, 그는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측근들과 친분을 쌓게 되고, 곧 바그다드병원단지·바스라하수처리시설·철도 건설 공사 등을 수주했다. 회사 내부에서도 ‘리스크가 가장 높은 나라’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그는 이라크에 ‘올인’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81년에도 이라크 수주액은 현대건설의 전체 해외공사비 중 78.3%를 차지했다. 78~85년까지 이라크에서 벌인 26개 사업의 공사대금은 41억달러어치(이자·원금 합계)에 이르렀다. 91년 걸프전이 터지며, 이라크 미수금은 현대의 목을 죄어왔다. 92년 초 이 후보가 현대를 떠날 당시엔 25억여달러(이자·원금 합계)만 회수한 상태였고, 이라크 미수금은 현대건설의 국내외 공사 미수금 가운데 62.5%를 차지했다. 당시 만기일이 지난 돈만 해도 2376억7천만원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이 후보는 81년 이후부터 대손충당금을 한 푼도 적립하지 않았다. 현대건설은 끝내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맞고 이듬해 6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회계사 최영태(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씨는 “채권 회수가 의문시된 상황이었는데도, 본인은 받을수 있다고 주장하며, 경영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대손충당금을 전혀 쌓지 않은 것은 부실의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워크아웃 이후 현대건설 사장에 오른 심현영씨는 2000년 6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대의 어려움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15년 전 이라크에서 (철도) 공사비 10억달러를 못 받은 이후 이걸 보전하려고 물량위주로 공사를 하다 보니 수익성이 나빠졌다”고 당시의 무리한 투자를 비판했다. 이 후보는 “실패를 안 한 사람치고 잘 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실패 속에서 그만큼의 노하우들이 축적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사업가는 도전과 실패 속에서 성공의 기회를 찾아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국가지도자에게는 실패를 밑거름 삼을 시간도, 여유도 없다는 점이다. 지도자가 선택한 위험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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