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3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인권단체 연석회의’와 민주노총, 전국철거민연합 등의 소속 회원들이 12일 오전 서울 청운동 청와대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몽구 현대차그룹,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에 대한 특별 사면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재벌·언론사주 ‘묻지마 사면’
무분별 정·재계 사면 논란
무분별 정·재계 사면 논란
“총수들 경제살리기 매진할 여건 마련”
실제론 경영활동 장애 없어 해명 궁색
김승연회장 `폭력’ 아닌 경제인 분류도
법원 허탈…학계 “이명박정부 법치 원칙 모순”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틈만 나면 “낮은 법질서 수준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법질서 확립’을 목청높여 강조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등은 “법질서를 바로세우겠다”는 명분으로 무차별적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이번 8·15 사면 내용은 그런 ‘법질서 확립’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현 정부가 말하는 법치주의가 이중적이고 자가당착적인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비리 행위가 들통났던 재벌 총수들은 항소심 재판에 계류된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빼고는 거의 예외 없이 이번 특별사면 대상에 들었다. 재계단체들이 청와대와 법무부에 이들에 대한 사면을 강력히 요구할 때부터 얼마간 예견된 것이었지만, 그나마 옥석을 가리려는 흔적도 엿보이지 않는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은 각각 형이 확정된 지 3개월이 안 됐고, 정 회장은 사회봉사 명령을 마치지도 않은 상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집행유예 판결의 조건이라고 볼 수 있는 사회봉사를 완료하지 않았는데 사면한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복폭행 사건’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경제활동과 무관한 ‘폭력사범’이지만 경제인이란 명분으로 사면됐다.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았지만 포함됐고,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은 지난해 말 지방세 4억원을 체납한 ‘고액 체납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정부가 사면의 명분으로 내건 ‘원활한 경영활동’도 근거가 희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검찰 간부는 “이번에 사면된 재벌 회장들은 그동안에도 언제든지 외국 출입을 해 왔고 심지어 출입국이 가장 까다롭다는 미국도 자유롭게 오갔다”며 “사면 대상자 중엔 기업활동을 하지 않는 경제인들도 여럿 된다”고 지적했다.
비리를 저지른 인사는 경영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게 경제 분야의 법치 논리이고 장기적으로 기업과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롭다는 지적이 나오는데도, 법무부는 궁색한 설명을 내놨다. ‘배임·횡령 등 반기업적 범죄를 저지른 총수들에게 경영을 맡기는 게 경제에 긍정적일 수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법무부 관계자는 “개인적 용도가 아닌, 회사를 위해 횡령·배임을 저지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2세에게 회사를 넘겨주기 위한 범죄도 기업을 위한 것으로 봐야 하나’라는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국민 대통합’ 명분도 설득력이 약하다. 지난 대선에서 이 대통령을 지지한 한국노총 관련자 13명이 사면된 반면,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아 한국노총에서조차 ‘유감’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법무부는 또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 위반자는 “법질서 확립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수호 차원에서 배제했다”고 밝혀, 대통합이라는 취지를 무색게 했다.
이번 사면 과정에서 드러난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이 법치주의의 근본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일부 경제인 사면과 관련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면서도 경제살리기를 위해 기업인들을 포함시켰다는 게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의 설명이다. 이 대변인은 또 사면 대상자들은 모두 앞 정권 때의 일로 처벌받은 이들로, “새 정부 출범 후에 빚어진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일체 사면복권이 없을 것”이라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는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엄정하게 운용돼야 할 형벌제도를 임의적으로 운용할 수 있고, 국가 형벌권을 정확한 근거 없이 경제 문제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일선 판사들은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중소기업 대표들도 사면하고, 여론을 의식해 ‘생계형 범죄’도 사면하는 과정에서 법과 원칙은 무시되고 있다”며 “판사들 사이에선 ‘하루라도 빨리 선고하고 사면을 받게 해 피고인한테 진 마음의 빚이나 갚아야겠다’는 농담도 나온다”고 말했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헌법학)는 “솔선수범해야 할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사면을 남발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강조한 ‘법치주의 확립’과 정면으로 모순된다”며 “특별사면도 국회의 동의를 받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현철 이형섭 기자 fkcool@hani.co.kr
실제론 경영활동 장애 없어 해명 궁색
김승연회장 `폭력’ 아닌 경제인 분류도
법원 허탈…학계 “이명박정부 법치 원칙 모순”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틈만 나면 “낮은 법질서 수준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법질서 확립’을 목청높여 강조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등은 “법질서를 바로세우겠다”는 명분으로 무차별적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이번 8·15 사면 내용은 그런 ‘법질서 확립’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현 정부가 말하는 법치주의가 이중적이고 자가당착적인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비리 행위가 들통났던 재벌 총수들은 항소심 재판에 계류된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빼고는 거의 예외 없이 이번 특별사면 대상에 들었다. 재계단체들이 청와대와 법무부에 이들에 대한 사면을 강력히 요구할 때부터 얼마간 예견된 것이었지만, 그나마 옥석을 가리려는 흔적도 엿보이지 않는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과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은 각각 형이 확정된 지 3개월이 안 됐고, 정 회장은 사회봉사 명령을 마치지도 않은 상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집행유예 판결의 조건이라고 볼 수 있는 사회봉사를 완료하지 않았는데 사면한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복폭행 사건’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경제활동과 무관한 ‘폭력사범’이지만 경제인이란 명분으로 사면됐다.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았지만 포함됐고,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은 지난해 말 지방세 4억원을 체납한 ‘고액 체납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주요 사면·복권 대상자
이번 사면 과정에서 드러난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이 법치주의의 근본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일부 경제인 사면과 관련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면서도 경제살리기를 위해 기업인들을 포함시켰다는 게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의 설명이다. 이 대변인은 또 사면 대상자들은 모두 앞 정권 때의 일로 처벌받은 이들로, “새 정부 출범 후에 빚어진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일체 사면복권이 없을 것”이라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는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엄정하게 운용돼야 할 형벌제도를 임의적으로 운용할 수 있고, 국가 형벌권을 정확한 근거 없이 경제 문제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일선 판사들은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중소기업 대표들도 사면하고, 여론을 의식해 ‘생계형 범죄’도 사면하는 과정에서 법과 원칙은 무시되고 있다”며 “판사들 사이에선 ‘하루라도 빨리 선고하고 사면을 받게 해 피고인한테 진 마음의 빚이나 갚아야겠다’는 농담도 나온다”고 말했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헌법학)는 “솔선수범해야 할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사면을 남발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강조한 ‘법치주의 확립’과 정면으로 모순된다”며 “특별사면도 국회의 동의를 받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현철 이형섭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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