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눈’ 맞춰보기
역시나 다른 눈높이 “일본의 식민정책으로 한국에 과학적 경영기법이 도입되고 대규모 백화점이 들어서는 등 근대성이 나타났다.”(일본) “외형상 근대성이 보이긴 하지만 이는 일제의 수탈적 식민지배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한국)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3년 간의 공동연구로는 메우기 힘든 간극이 존재했다. 지난 2001년 10월 한일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이듬해 5월 발족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1일 내놓을 최종 보고서를 미리 들여다본 결과다. 특히 근대사에선 한·일 학자들의 인식 사이에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두 나라 학자들의 역사인식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그대로 드러내겠다는 위원회의 애초 취지에 비춰보면,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두 나라 학자들은 4∼6세기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두고 설전을 벌였다. 한국 쪽은 이 시기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쪽은 광개토왕비 등에 비춰 당시 왜가 매우 강성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두 나라 학자들 모두 임나일본부설을 통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은 확인해,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세사에선 왜구의 성격과 조선통신사의 역할을 보는 관점에서 극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한국 쪽은 왜구를 당시 국제교류 질서에서 벗어난 ‘위반자’로 규정했으나, 일본 쪽은 왜구 역시 당시 질서의 엄연한 ‘구성자’라고 맞섰다. 일본 쪽은 특히 무로마치 막부(1338∼1573)가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로 간주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문화전파자’의 역할을 강조한 한국 쪽 해석을 깎아내렸다. 근·현대사에선 한층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한국 쪽은 개항기 일본과 맺은 조약들은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쪽은 당시 일본이 힘의 우위를 배경으로 조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근대 국제법이 안고 있는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일본 쪽은 특히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조공을 매개로 한 종속관계로 파악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부인하기도 했다. 이런 인식은 최근 검정을 통과한 후소사 교과서에서도 보이는 대목이어서,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역사인식이 왜곡돼 있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두 나라 학자들은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를 드러냈다. 일본 쪽은 식민지배가 조선의 경제 성장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강조했으나, 한국 쪽은 그것은 일제를 위한 강요된 성장일 뿐이라고 맞섰다. 예컨대 경부선 개발 비용은 일본이 강탈한 압록강과 연변 지역의 벌채권에서 나왔으며, 당시 서울에 들어선 백화점은 일본인과 일본에 빌붙은 일부 조선인들을 위한 시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한일 공동역사연구위원회는 2001년 4월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같은해 10월 열린 한일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2002년 5월 발족했다. 역사인식의 ‘합일점’을 찾기 위해선 그 전에 무엇이 다른가를 규명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럼으로써 향후 두 나라 교과서 집필자들에게 참고자료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곁들였다. 이에 따라 두 나라에서 각각 10명 안팎의 학자들이 참여해, 고대·중세·근현대 3개 분과에서 19개 주제를 놓고 50여차례 합동회의를 열었다. 1기 공동연구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남에 따라 한일 간에 역사인식의 합일점을 찾는 과제는 다음 공동연구로 넘어갔다. 한일 정상은 지난해 말 이부스키 회담에서 2기 공동연구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정부는 2기 공동연구에선 연구결과가 교과서에 직접 반영되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1기 공동연구에서 한국 쪽 총간사를 맡은 조광 고려대 교수(한국사)는 31일 “일본 역사교과서 집필자들이 한국의 연구성과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공동연구가 한국의 논리를 일본에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역시나 다른 눈높이 “일본의 식민정책으로 한국에 과학적 경영기법이 도입되고 대규모 백화점이 들어서는 등 근대성이 나타났다.”(일본) “외형상 근대성이 보이긴 하지만 이는 일제의 수탈적 식민지배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한국)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3년 간의 공동연구로는 메우기 힘든 간극이 존재했다. 지난 2001년 10월 한일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이듬해 5월 발족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1일 내놓을 최종 보고서를 미리 들여다본 결과다. 특히 근대사에선 한·일 학자들의 인식 사이에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두 나라 학자들의 역사인식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그대로 드러내겠다는 위원회의 애초 취지에 비춰보면,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두 나라 학자들은 4∼6세기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두고 설전을 벌였다. 한국 쪽은 이 시기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쪽은 광개토왕비 등에 비춰 당시 왜가 매우 강성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두 나라 학자들 모두 임나일본부설을 통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은 확인해,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세사에선 왜구의 성격과 조선통신사의 역할을 보는 관점에서 극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한국 쪽은 왜구를 당시 국제교류 질서에서 벗어난 ‘위반자’로 규정했으나, 일본 쪽은 왜구 역시 당시 질서의 엄연한 ‘구성자’라고 맞섰다. 일본 쪽은 특히 무로마치 막부(1338∼1573)가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로 간주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문화전파자’의 역할을 강조한 한국 쪽 해석을 깎아내렸다. 근·현대사에선 한층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한국 쪽은 개항기 일본과 맺은 조약들은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쪽은 당시 일본이 힘의 우위를 배경으로 조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근대 국제법이 안고 있는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일본 쪽은 특히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조공을 매개로 한 종속관계로 파악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부인하기도 했다. 이런 인식은 최근 검정을 통과한 후소사 교과서에서도 보이는 대목이어서,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역사인식이 왜곡돼 있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두 나라 학자들은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를 드러냈다. 일본 쪽은 식민지배가 조선의 경제 성장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강조했으나, 한국 쪽은 그것은 일제를 위한 강요된 성장일 뿐이라고 맞섰다. 예컨대 경부선 개발 비용은 일본이 강탈한 압록강과 연변 지역의 벌채권에서 나왔으며, 당시 서울에 들어선 백화점은 일본인과 일본에 빌붙은 일부 조선인들을 위한 시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한일 공동역사연구위원회는 2001년 4월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같은해 10월 열린 한일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2002년 5월 발족했다. 역사인식의 ‘합일점’을 찾기 위해선 그 전에 무엇이 다른가를 규명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럼으로써 향후 두 나라 교과서 집필자들에게 참고자료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곁들였다. 이에 따라 두 나라에서 각각 10명 안팎의 학자들이 참여해, 고대·중세·근현대 3개 분과에서 19개 주제를 놓고 50여차례 합동회의를 열었다. 1기 공동연구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남에 따라 한일 간에 역사인식의 합일점을 찾는 과제는 다음 공동연구로 넘어갔다. 한일 정상은 지난해 말 이부스키 회담에서 2기 공동연구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정부는 2기 공동연구에선 연구결과가 교과서에 직접 반영되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1기 공동연구에서 한국 쪽 총간사를 맡은 조광 고려대 교수(한국사)는 31일 “일본 역사교과서 집필자들이 한국의 연구성과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공동연구가 한국의 논리를 일본에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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