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과정 등 정황 진술…‘신빙성’ 의심들면 무죄
돈을 건넨 공여자의 진술 말고는 뾰족한 증거가 없는 뇌물사건의 유무죄는 어떻게 가려질까?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수수 혐의를 둘러싼 공방이 법정으로 옮겨가면서 비슷한 예전 사건 등이 관심을 끌고 있다. 대법원 판례는 이런 경우 ‘공여자의 진술에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만한 신빙성이 있어야 한다’는 태도를 지키고 있다.
진술만으로 공소가 제기된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는 빈번하다.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은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지 3년여 만인 지난 9월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10월과 11월에도 전 익산시장 비서실장 이아무개씨와 전 국무조정실장 정아무개씨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이들 사건에서 “공여자의 진술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진술 신빙성’은 비슷한 사건에서 엇갈리는 판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현대 비자금’ 사건으로 기소된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현 민주당 의원)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그렇다.
양도성 예금증서(CD) 150억원어치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박 의원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전달자로 지목된 김아무개(미국 체류)씨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2004년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김씨는 “나는 박 의원의 비자금 관리자로, ‘이 전 회장에게 150억원을 요구하라’는 지시까지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씨는 박 의원이 돈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이 돈을 챙긴 것으로 인정될 상황이었기에, 법원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배달사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또 “이 전 회장의 진술은 수차례 바뀌었으며, 검찰이 그의 행적과 통화기록 등을 확보하지 않아 사건 조작의 의심이 있다”고 밝혔다.
반면, 같은 시기 200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권 전 고문은 징역 5년의 유죄가 확정됐다. 권 전 고문은 “현금 200억원을 50억원씩 4차례 승용차로 실어날랐다는데, 현금 50억원의 무게는 500㎏에 달한다”고 주장해, 당시 재판부가 그만한 현금을 승용차 트렁크에 넣을 수 있는지와 운전이 가능한지를 현장검증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그 뒤 “고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전 회장 등이 진술한 비자금 조성과 전달 과정이 매우 구체적이고, 경험하지 않았다면 모를 내용으로 보인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진술의 신빙성’을 따지는 데는 공여자가 진술한 동기도 중요하게 고려된다. 박 의원 사건처럼, 변 전 국장 사건에서도 뇌물 제공자는 돈을 전달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죄를 뒤집어쓸 처지에 있었다. 법원은 공여자가 ‘배달사고’를 숨기려고 거짓 진술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뇌물공여 정황 진술이 객관적 상황과 어긋나도 공소사실은 인정받지 못한다.
음성적인 ‘플리바기닝’ 가능성도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공여자가 처벌을 적게 받거나, 다른 사안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해 검찰에 ‘협조’하면서 진실이 왜곡될 소지가 있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이다. 한 전 총리 쪽도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의 건강이 좋지 않아 보석이 절실하다는 점이 거짓 진술의 배경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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