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주최로 열린 제641차 수요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해방 60주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에게 정의를!’ 캠페인 발대식을 열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황석주 기자
군인·위안부·원폭피해 소송 40여건 내
생존자 9년전의 30% “죽고나면 뭘 해”
우키시마 1심 일부승소등 서서히 성과 19일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정태랑(65·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씨는 “지난 40년 동안 너무 외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1941년 경북 구미시 고아읍에서 석탄 광부로 사할린에 끌려간 뒤 65년째 소식이 없는 ‘강제 징용자’(정봉규·1918년생)의 아들이다. 정씨는 서른이 넘어 ‘철이 든 뒤’ 대전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현 국가기록원)와 일본 정부를 찾아다니며 “선친의 생사만이라도 알려달라”고 매달렸지만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한-일 협정 문서가 공개됐다고 해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사무실을 찾았다”며 말끝을 흐렸다. ◇ 끝나지 않은 싸움=1965년 체결된 한-일 협정 이후 일제 침략전쟁의 피해자 보상에 40년 동안 귀를 틀어막은 한국과 일본 정부에 맞선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몸부림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한 40여건의 소송은 대부분 패소했지만, 이런 움직임은 잊혀져 가는 전쟁의 참혹함과 그 아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에 사회 전체가 귀를 기울이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등의 집계 자료를 보면, 일제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자는 △군인·군속 36만5천명(일본 주장 24만2341명) △노무자 66만7684명 △군 위안부 4만~20만명(추정) △원폭 피해자 7만명(추정) △사할린 동포 4만3천명(추정)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사망자 524명(피해자들 5000여명 주장) △비시(B·C)급 전범자 148명(사형 23명) 등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시급 전범자는 일본군에 잡힌 연합군 포로 수용소 감시원이었던 조선인들로,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영국·오스트레일리아·미국 등의 법정에서 148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23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일제의 앞잡이라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도 받지 못했다. 1995년 이의도씨 등 전범자 6명이 도쿄지방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위원회, 미쓰비시중공업 한국징용자재판지원회, 시베리아삭풍회, 일제강제연행 한국생존자협회, 사할린 중소이산가족회, 나눔의 집 등 20여개의 단체를 만들어 40여건의 재판을 진행중이다. ◇ 시간이 없다=일본 법원은 한국인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소송에 대해 일본 정부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메이지 헌법에는 국가 위법 행위에 대한 배상 의무가 없다는 ‘국가 무책임론’ △한-일 협정으로 인한 청구권 소멸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법률 부재 등의 이유를 들어 소를 기각해 왔다. 17일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 공개 원고인단 99명이 진행 중인 피해보상 청구소송 14건의 진행 상황을 봐도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간 것은 신일본제철로부터 한 사람당 200만엔을 받은 이상구씨 소송 하나밖에 없다. 지난해 11월에는 각각 12년과 13년 동안 재판이 걸린 위안부·강제징용자 소송과 우키시마호 피해자 소송이 일본 최고 법원에서 나란히 최종 기각됐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 대부분은 숨을 거뒀다. 일제강제연행 한국생존자협회는 1996년까지만 해도 1만5천명으로 조사됐던 생존자가 지금은 5000명에도 못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1980년에 276명이었던 생존자가 지금은 2명밖에 안 남았다. 선태수(80) 일제강제연행 한국생존자협회장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앞으로 5년만 더 지나면 보상을 해주고 싶어도 못해주는 때가 온다”고 말했다.
◇ 소박하지만 빛나는 성과들=김은식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은 “보수적인 일본 법원의 판결 앞에서 번번이 좌절했지만, 피해자들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10명이 1992년 야마구치지방법원에 낸 소송(관부재판)과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생존자들이 같은해 교토지방법원에 낸 소송 1심에서는 일본 법원이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들은 항소심에서 뒤집혀 보상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건설적인 한-일 관계를 정착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일 협정 문서 공개도 100명의 원고인단(소송 진행 도중 1명 사망)이 2년 넘는 법정 투쟁을 거쳐 일궈낸 성과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에 끌려갔다가 피폭된 정창희씨 등 한국인 6명은 2000년 5월1일 이 회사를 상대로 부산지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미쓰비시 쪽은 “한-일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사라졌다”고 주장하자, 법원은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외교통상부에 “한-일 협정 문서를 공개할 것”을 요청했다. 2002년 10월부터 2년 동안 소송이 이어졌고, 1심에서 승소한 뒤 문서는 공개됐다. 장완익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은 “한-일 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피해자들의 노력이 일본 법원의 진보적인 판결들과 한-일 회담 문서 공개라는 성과를 낳았다”며 “피해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은 이제 한국과 일본 정부의 몫”이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생존자 9년전의 30% “죽고나면 뭘 해”
우키시마 1심 일부승소등 서서히 성과 19일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정태랑(65·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씨는 “지난 40년 동안 너무 외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1941년 경북 구미시 고아읍에서 석탄 광부로 사할린에 끌려간 뒤 65년째 소식이 없는 ‘강제 징용자’(정봉규·1918년생)의 아들이다. 정씨는 서른이 넘어 ‘철이 든 뒤’ 대전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현 국가기록원)와 일본 정부를 찾아다니며 “선친의 생사만이라도 알려달라”고 매달렸지만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한-일 협정 문서가 공개됐다고 해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사무실을 찾았다”며 말끝을 흐렸다. ◇ 끝나지 않은 싸움=1965년 체결된 한-일 협정 이후 일제 침략전쟁의 피해자 보상에 40년 동안 귀를 틀어막은 한국과 일본 정부에 맞선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몸부림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이 진행한 40여건의 소송은 대부분 패소했지만, 이런 움직임은 잊혀져 가는 전쟁의 참혹함과 그 아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에 사회 전체가 귀를 기울이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등의 집계 자료를 보면, 일제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자는 △군인·군속 36만5천명(일본 주장 24만2341명) △노무자 66만7684명 △군 위안부 4만~20만명(추정) △원폭 피해자 7만명(추정) △사할린 동포 4만3천명(추정)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사망자 524명(피해자들 5000여명 주장) △비시(B·C)급 전범자 148명(사형 23명) 등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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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시급 전범자는 일본군에 잡힌 연합군 포로 수용소 감시원이었던 조선인들로,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영국·오스트레일리아·미국 등의 법정에서 148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23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들은 일제의 앞잡이라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도 받지 못했다. 1995년 이의도씨 등 전범자 6명이 도쿄지방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위원회, 미쓰비시중공업 한국징용자재판지원회, 시베리아삭풍회, 일제강제연행 한국생존자협회, 사할린 중소이산가족회, 나눔의 집 등 20여개의 단체를 만들어 40여건의 재판을 진행중이다. ◇ 시간이 없다=일본 법원은 한국인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소송에 대해 일본 정부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메이지 헌법에는 국가 위법 행위에 대한 배상 의무가 없다는 ‘국가 무책임론’ △한-일 협정으로 인한 청구권 소멸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법률 부재 등의 이유를 들어 소를 기각해 왔다. 17일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 공개 원고인단 99명이 진행 중인 피해보상 청구소송 14건의 진행 상황을 봐도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간 것은 신일본제철로부터 한 사람당 200만엔을 받은 이상구씨 소송 하나밖에 없다. 지난해 11월에는 각각 12년과 13년 동안 재판이 걸린 위안부·강제징용자 소송과 우키시마호 피해자 소송이 일본 최고 법원에서 나란히 최종 기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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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피해자 대부분은 숨을 거뒀다. 일제강제연행 한국생존자협회는 1996년까지만 해도 1만5천명으로 조사됐던 생존자가 지금은 5000명에도 못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1980년에 276명이었던 생존자가 지금은 2명밖에 안 남았다. 선태수(80) 일제강제연행 한국생존자협회장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앞으로 5년만 더 지나면 보상을 해주고 싶어도 못해주는 때가 온다”고 말했다.
◇ 소박하지만 빛나는 성과들=김은식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은 “보수적인 일본 법원의 판결 앞에서 번번이 좌절했지만, 피해자들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10명이 1992년 야마구치지방법원에 낸 소송(관부재판)과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생존자들이 같은해 교토지방법원에 낸 소송 1심에서는 일본 법원이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들은 항소심에서 뒤집혀 보상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건설적인 한-일 관계를 정착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일 협정 문서 공개도 100명의 원고인단(소송 진행 도중 1명 사망)이 2년 넘는 법정 투쟁을 거쳐 일궈낸 성과다.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에 끌려갔다가 피폭된 정창희씨 등 한국인 6명은 2000년 5월1일 이 회사를 상대로 부산지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미쓰비시 쪽은 “한-일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사라졌다”고 주장하자, 법원은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외교통상부에 “한-일 협정 문서를 공개할 것”을 요청했다. 2002년 10월부터 2년 동안 소송이 이어졌고, 1심에서 승소한 뒤 문서는 공개됐다. 장완익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은 “한-일 양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피해자들의 노력이 일본 법원의 진보적인 판결들과 한-일 회담 문서 공개라는 성과를 낳았다”며 “피해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은 이제 한국과 일본 정부의 몫”이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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