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기지 이전비 증액도 일방 결정…‘중대 조약’ 자의적 해석
서울 용산의 미군기지와 제2사단을 2008년까지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하는 내용의 용산미군기지이전협정(YRP)과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LPP) 비준동의안이 2004년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전 비용이 5조6000억원에 이르는 만큼 당시 국회 동의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미 두 나라는 지난달 기존 협정을 바꿔 미군기지 이전 시기를 2016년으로 늦추고, 한국 쪽 부담액을 3조4000억원이나 늘린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에 정부는 국회 비준 동의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 내용을 약간 바꾼 것이라 비준 동의가 필요한 ‘중대한’ 조약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자체 판단 때문이다. 미군기지 이전 시기를 정부 맘대로 연기하고 3조원이 넘는 국민 세금이 국회 동의도 없이 쓰여지는 셈이다. 이처럼 막대한 재정 부담이 드는 조약이 정부 임의로 체결되고 수정되는 일이 허다하다.
10일 박주선 민주당 의원에게 외교통상부가 제출한 ‘한국이 체결한 조약 현황’ 자료를 보면, 국제조약 2745건 가운데 81.7%인 2242건(양자 1824건, 다자 418건)이 국회 동의 없이 체결됐다. 전체의 18.3%인 503건(양자 321건, 다자 182건)만 국회 동의를 받았다. 10건 가운데 8건의 조약이 행정부의 임의적인 판단으로 체결되고 있다.
헌법 60조 1항에는 △상호원조·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등은 국회의 체결·비준 동의를 받도록 돼 있다. 그럼에도 수천건의 조약이 국회 동의 없이 체결·발효되고 있는 건, 비준 동의를 받아야 하는 주요 조약의 범위를 명시한 하위 법률이 없기 때문이다.
2008년 체결된 우즈베키스탄과의 1억2000만달러(약 1300억원) 대외경제차관협정도 국회 동의가 없었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에 따른 수출입은행 100억달러(약 10조8350억원) 지급보증도 마찬가지다. 미국·일본 등 대다수 국가는 모든 조약에 국회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일부 조약에 대해서만 의회 동의를 받도록 한 스페인은, 의회에서 사전 승인하지 않은 조약은 즉시 그 결과를 상원과 하원에 보고하도록 법률로 규정해놓고 있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국회의 조약 동의권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절차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주선 의원은 “헌법은 행정부에 ‘백지위임장’을 준 적이 없다. 국민의 권리·의무를 정하는 조약을 몇몇 공무원이 밀실에서 체결하는 행태를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다”며 4월 국회에서 조약절차법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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