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폭격전대 소속 B-29기가 북한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참전 미 중장 회고록으로 본 한국전 비사
당시 유엔군 공중작전 지휘
“따로 작전 펴려던 육·해군의
협동성 강화는 큰 과제였다”
당시 유엔군 공중작전 지휘
“따로 작전 펴려던 육·해군의
협동성 강화는 큰 과제였다”
6·25 당시 유엔군의 공중작전을 총괄 지휘한 미 극동공군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중장)의 일기가 최근 공개됐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1951년 5월20일까지 일기를 묶은 <한국전쟁 일기>(플래닛미디어 펴냄·미국에서 1999년 발간)에서 그는 하루하루 전쟁 상황과 함께 미국의 핵무기 사용 검토, 미 공군의 오폭으로 인한 영국군 40여명 사상 등 비사를 털어놨다.
■ 미, 개전 3개월 뒤 핵폭탄 사용 검토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이 1950년 12월1일치 일기에서 언급한 본국과의 비밀전문을 보면, 미국은 1950년 9월 핵무기 사용 검토를 시작했다. 연구 책임자인 미 육군성 작전연구실 엘리스 존스 박사가 직접 전장을 찾았고, 사용될 핵무기 개수가 30~50개라는 언급도 나왔다. 그즈음 트루먼 대통령이 중공군을 상대로 원자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고 언급했고, 극동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기자회견을 열어 “원자폭탄 사용이 허가된다면 (중국) 단둥, 선양, 베이징, 상하이 등이 목표가 될 것이며, 확대된다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 정책 결정자들은 미군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무기를 소진하도록 한 뒤 주전장인 유럽을 공격하려는 게 소련의 속셈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핵무기 사용, 만주 폭격 등은 무산됐다. 맥아더는 “적의 근원지를 공격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지금껏 보아왔던 것 중 가장 우스꽝스럽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밖에 1950년 9월 대구 서쪽 전선에서 미 공군의 오폭으로 영국군 20명이 숨지고 21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미 공군기들이 종종 소련과 중국 국경을 넘어가 논란이 되곤 했다.
■ 합동성 문제 등 현재도 유효한 시사점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일기에서 한국전쟁 때 “세 가지와 전쟁을 치렀다”고 회고한다. 공산주의자와의 전쟁, 육군·해군과의 전쟁, 언론과의 전쟁이 그것이다. 공군을 수족처럼 다루려 했던 육군이나 공군과 별도로 항공작전을 진행하려던 해군과의 원만한 관계 설정, 언론과의 긴장은 그에게 직접 전투 못지않은 큰 과제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는 지금 우리 군이 맞닥뜨린 문제들과 유사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군 상부지휘구조 개편의 핵심이 바로 합동성 강화이고, 지난해 천안함 사태 때 군은 거듭된 말 뒤집기로 언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사 연구 전문가인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3군 합동작전에 관한 얘기가 자주 등장해 지금 우리 군에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기자·현역군인·전문번역가로 꾸려진 4명의 번역자 가운데 한 명인 김택 공군 소령은 “일기라는 특성상 미군 최고 지휘부의 기획과 전략, 정부의 정치적 견해, 이를 둘러싼 각 개인들의 견해 등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어 유익했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미 극동공군사령관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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