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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길을 찾아서] 숨바꼭질 끝에 만난 므위니 대통령의 눈물 / 한완상

등록 2012-08-21 19:54수정 2012-08-21 21:16

1994년 5월6일 필자(오른쪽 둘째)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아프리카 탄자니아를 방문해 알리 하산 므위니 대통령(왼쪽 둘째)을 만났다. 행정수도 도도마의 작은 농장에서 장화 차림으로 특사 일행을 맞은 므위니 대통령은 한국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요청했다.
1994년 5월6일 필자(오른쪽 둘째)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아프리카 탄자니아를 방문해 알리 하산 므위니 대통령(왼쪽 둘째)을 만났다. 행정수도 도도마의 작은 농장에서 장화 차림으로 특사 일행을 맞은 므위니 대통령은 한국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요청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3
1994년 5월5일 새벽 2시15분에 일어났다. 이집트에서 멀지 않은 남쪽 나라 탄자니아의 므위니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데 직항 비행기가 없어 불편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아프리카 대륙이었지만 아프리카 나라들을 잇는 항공편이 없던 시절이었다. 부득이 우리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거슬러 올라가 되돌아 내려와야 했다. 새벽 3시 출발해 밤 9시20분에 도착하는 지루하고 피곤한 일정이었다.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비행장에 도착하니 박부열 대사 일행과 탄자니아 정부의 느자로 아시아 담당 국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마침 탄자니아 외무부는 지난 4월 터진 르완다 대학살 사건으로 비상이 걸린 듯했다. 부족간 갈등으로 어림잡아 100만명이 희생된 비극적인 학살사건, 이 세기적 인종학살 사건에서 탄자니아 정부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므위니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방문했던 르완다 대통령과 부룬디 대통령이 같은 비행기로 되돌아가다 르완다의 키갈리 공항에서 나란히 피격을 당하면서 즉각 부족간 전쟁으로 번져 끔찍한 살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 국면에서 한국 특사 일행을 맞았으니 우리가 가는 날이 초상날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공항에는 귀빈용 벤츠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박 대사의 신형 벤츠와 비교되는 정말 낡고 오래된 모델이었다. 느자로 국장은 마음 착한 시골 아줌마처럼 생겼는데, 정말 아줌마같이 편하게 우리를 영접해 주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아직까지 므위니 대통령을 만날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튿날 오전 반가운 소식이 왔다. 므위니 대통령이 잔지바르라는 섬에서 일정이 있어서 우리 특사 일행에게 전용기를 보낼 것이고 돌아올 때는 쾌속정을 활용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그 계획이 또 바뀌었단다. 새로 알려준 접견 장소인 행정수도 도도마는 다르에스살람에서 내륙으로 480㎞ 떨어진 먼 곳이었다. 접견 시간도 오전 11시라니 걱정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예의 그 낡은 귀빈차를 타고 한적한 2차선 도로를 한참 달리다 보니 왼쪽 멀리 웅장한 산 밑으로 깔끔한 마을이 보였다. 외무부 관리의 말로는 그 마을이 북한의 천리마운동 일꾼이 개간한 뒤 발전시키고 있는 모범마을이라고 했다. 북한이 아프리카의 마음을 우리보다 훨씬 앞서 사로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차가 요동쳤다. 펑크가 난 것이다. 길가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도도마에 도착해서도 숨바꼭질은 계속됐다. 대통령 집무실로 연락을 했더니 관저로 갔단다. 위치를 확인하고 20분쯤 달려갔더니 관저 경비실에서는 집무실로 갔단다. 다시 집무실로 차를 돌려 갔더니 이번에는 농장으로 갔다고 했다. 물론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이런 예측 불가능성, 불규칙성이 아프리카의 현실이구나. 비정상적 사태를 정상적으로 다루는 그들의 ‘여유’에 놀라면서도 그 여유가 없는 우리를 성찰해봤다.

포장도 안 된 붉은 흙길을 30분가량 달려가니 옥수수밭 한가운데 작은 농장이 나타났다. 낮게 앉은 단층건물 앞에 기관총을 장착한 지프차를 군인 4~5명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장화를 신은 초로의 농군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었다. 바로 므위니 대통령이었다. 그의 촌로 같은 소박한 모습이 치밀어오르던 나의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는 조금도 오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한완상 전 부총리
한완상 전 부총리
므위니 대통령은 참으로 초라한 농장의 응접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40분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르완다 내전의 전망을 묻자 므위니의 눈동자는 잠시 축축해지는 듯했다. 그가 느끼는 곤혹스러움과 아픔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잘 절제해 가면서 소탈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런 아픔 속에서도 탄자니아가 좀더 착실하게 시장경제체제로 나아갈 수 있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 기업인들이 적극적으로 투자해주기를 바랐다.

다르에스살람으로 돌아온 뒤 현지 동포들과 만찬을 함께 하면서 므위니 대통령의 관심을 전달해주었다. 그곳에서 살충제를 제조하는 한국 기업인을 만났다. 이태조 사장인데 현지에서 존경받고 있었다. 그의 고생담을 들으면서 나는 이 사장이야말로 이 시대의 작은 장보고라고 느꼈다. 자랑스러운 신한국인이었다. 정부 파견 의사도 만났는데 오지에서 온갖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아프리카인을 치유해주는 ‘한국인 슈바이처’라고 느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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