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호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가 2일 오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세워진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 국민운동본부’ 천막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여야 협상 경과를 보고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전문가가 본 여야 프레임전쟁
여권은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대선불복 프레임으로 보려 한다
불복종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민주당이 선거무효소송 냈거나
대통령 인정 않는 행동 했어야 국정원에 의한 선거개입은
그 자체로 국기문란이면서
민주화운동의 위대한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야권의 민주주의 프레임은
대중적인 소구력을 지닌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를 관점이라고 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듯 상황도 마찬가지다. 같은 사안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를 두고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frame)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프레임으로 설정하느냐 또는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는 정치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지금 여야간에는 치열한 프레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대해 야권은 민주주의 프레임으로, 여권은 대선 프레임으로 보고자 한다.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보면 국정원은 지난 대선에서 불법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 태생적으로 정치머신의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고, 독재정권의 돌격대 역할을 해온 것이 국가정보기구다. 이 때문에 국정원에 의한 정치·선거개입은 그 자체로 국기문란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운동의 위대한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주주의 프레임은 대중적 소구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권은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대선 결과 불복의 차원으로 규정한다. 사실 장외투쟁을 빌미로 삼고 있긴 하지만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대한 논의 자체를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야당은 반대를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존재다. 한표라도 더 얻은 후보나 정당이 다 먹는 승자독식 다수제의 선거 제도 아래에서도 선거에 졌다는 이유로 야당의 반대를 무조건 결과에 대한 불복종으로 해석하는 건 옳지 않다. 무릇 불복종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행위를 통해 결과를 부정해야 한다. 민주당은 선거무효 소송을 내지도 않았고,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복의 태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여권의 의도는 분명하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지지와 문재인 후보 지지로 나뉜 진영 구도를 복원·유지해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을 정의 대 부정의의 문제로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민주주의의 프레임으로 보게 되면 새누리당으로선 대통령 선거 때의 진영 구도에 비해 훨씬 불리해진다. 그런데 대선 연장으로 규정하면 52% 대 48%의 구도가 돼 결코 불리하지 않게 된다. 프레임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새누리당은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당을 압도했다. 지난 총선이 정권심판의 장으로 치러지지 않도록 혁신 프레임을 들고나와 어렵다던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선 때엔 ‘박정희 대 노무현’의 구도를 내세워 정권교체론을 잠재웠다. 사회경제적 전선이 선명한 정책선거가 아니라 인물 대결의 선거로 만들어 승리할 수 있었다. 새누리당이 이처럼 프레임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건 무상급식 싸움을 찬반 대결구도로 치렀다가 패배한 경험 때문이다. 그 이후 새누리당은 복지나 경제민주화 등 시대과제로 제기된 어젠다에서 결코 찬반 구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찬반 구도를 누가 더 잘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우열 구도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우열 구도에선 인물요인이 중요한데, 이 점에선 박근혜 후보가 더 강했다. 정치에서 프레임이 갖는 효과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예는 미국의 빌 클린턴이 대통령 시절 보여준 사례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미국 민주당은 대패했다. 당시 공화당이 제기한 어젠다 중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게 균형예산이었다. 이 균형예산 개념을 수용하면 복지 재정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민주당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주당이나 백악관 참모들이 일제히 균형예산 반대를 외칠 때 클린턴의 전략가 딕 모리스는 수용을 주장했다. 여론이 균형예산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대신 공화당과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게 그의 논리였다. 즉, 균형예산에 대한 찬반 구도로는 승산이 없으니 우열 구도로 바꾸자는 주장이다. 고심 끝에 클린턴이 이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클린턴은 균형예산안을 둘러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새누리당이 지난 총선과 대선의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한 탓인지 지나치게 과욕을 부리는 듯하다. 대선불복 담론이 야당의 말실수를 잡아채 일시적으로 공세를 펴는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동하기에는 무리다. 촛불집회에서 간간이 대선 결과 부정의 구호가 보이고, 그 집회에 야당이 참여한다고 해서 불복이라고 매도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논법이면 선거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정조사 증인 출석에 미온적인 새누리당을 두고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프레임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충분해야 한다. 새누리당이 정권심판이나 교체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반엠비(MB)의 이미지를 가진 ‘박근혜’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을 대선불복론의 프레임으로 옭아매기엔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아무리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프레임도 실질적 기반이 없는 유사프레임은 역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쇠고기 수입 문제를 둘러싼 촛불집회를 반미나 반정부로 몰아세우다 되레 역풍을 초래하고 말았다. 아무리 힘으로 밀어붙여도 대선불복 프레임은 유사프레임일 뿐이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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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 국기문란이면서
민주화운동의 위대한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야권의 민주주의 프레임은
대중적인 소구력을 지닌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를 관점이라고 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듯 상황도 마찬가지다. 같은 사안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를 두고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frame)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어떤 프레임으로 설정하느냐 또는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는 정치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지금 여야간에는 치열한 프레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대해 야권은 민주주의 프레임으로, 여권은 대선 프레임으로 보고자 한다.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보면 국정원은 지난 대선에서 불법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 태생적으로 정치머신의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고, 독재정권의 돌격대 역할을 해온 것이 국가정보기구다. 이 때문에 국정원에 의한 정치·선거개입은 그 자체로 국기문란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운동의 위대한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주주의 프레임은 대중적 소구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권은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대선 결과 불복의 차원으로 규정한다. 사실 장외투쟁을 빌미로 삼고 있긴 하지만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대한 논의 자체를 그렇게 규정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야당은 반대를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존재다. 한표라도 더 얻은 후보나 정당이 다 먹는 승자독식 다수제의 선거 제도 아래에서도 선거에 졌다는 이유로 야당의 반대를 무조건 결과에 대한 불복종으로 해석하는 건 옳지 않다. 무릇 불복종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행위를 통해 결과를 부정해야 한다. 민주당은 선거무효 소송을 내지도 않았고,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복의 태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여권의 의도는 분명하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지지와 문재인 후보 지지로 나뉜 진영 구도를 복원·유지해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을 정의 대 부정의의 문제로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민주주의의 프레임으로 보게 되면 새누리당으로선 대통령 선거 때의 진영 구도에 비해 훨씬 불리해진다. 그런데 대선 연장으로 규정하면 52% 대 48%의 구도가 돼 결코 불리하지 않게 된다. 프레임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새누리당은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당을 압도했다. 지난 총선이 정권심판의 장으로 치러지지 않도록 혁신 프레임을 들고나와 어렵다던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선 때엔 ‘박정희 대 노무현’의 구도를 내세워 정권교체론을 잠재웠다. 사회경제적 전선이 선명한 정책선거가 아니라 인물 대결의 선거로 만들어 승리할 수 있었다. 새누리당이 이처럼 프레임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건 무상급식 싸움을 찬반 대결구도로 치렀다가 패배한 경험 때문이다. 그 이후 새누리당은 복지나 경제민주화 등 시대과제로 제기된 어젠다에서 결코 찬반 구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찬반 구도를 누가 더 잘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우열 구도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우열 구도에선 인물요인이 중요한데, 이 점에선 박근혜 후보가 더 강했다. 정치에서 프레임이 갖는 효과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예는 미국의 빌 클린턴이 대통령 시절 보여준 사례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미국 민주당은 대패했다. 당시 공화당이 제기한 어젠다 중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게 균형예산이었다. 이 균형예산 개념을 수용하면 복지 재정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민주당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주당이나 백악관 참모들이 일제히 균형예산 반대를 외칠 때 클린턴의 전략가 딕 모리스는 수용을 주장했다. 여론이 균형예산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대신 공화당과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게 그의 논리였다. 즉, 균형예산에 대한 찬반 구도로는 승산이 없으니 우열 구도로 바꾸자는 주장이다. 고심 끝에 클린턴이 이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클린턴은 균형예산안을 둘러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새누리당이 지난 총선과 대선의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한 탓인지 지나치게 과욕을 부리는 듯하다. 대선불복 담론이 야당의 말실수를 잡아채 일시적으로 공세를 펴는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동하기에는 무리다. 촛불집회에서 간간이 대선 결과 부정의 구호가 보이고, 그 집회에 야당이 참여한다고 해서 불복이라고 매도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논법이면 선거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정조사 증인 출석에 미온적인 새누리당을 두고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프레임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충분해야 한다. 새누리당이 정권심판이나 교체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반엠비(MB)의 이미지를 가진 ‘박근혜’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을 대선불복론의 프레임으로 옭아매기엔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아무리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프레임도 실질적 기반이 없는 유사프레임은 역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쇠고기 수입 문제를 둘러싼 촛불집회를 반미나 반정부로 몰아세우다 되레 역풍을 초래하고 말았다. 아무리 힘으로 밀어붙여도 대선불복 프레임은 유사프레임일 뿐이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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