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왼쪽)과 김종철 노동당 전 부대표가 8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진보정치의 위기와 해법을 놓고 대담을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복지를 이야기했던 민주노동당
정당득표 13%로 이어졌지만
총선 이후 당권투쟁 몰입
정치적인 매력을 못 보여줘 -‘이석기 사태’를 어떻게 보나? 박용진(이하 박) “최소한 RO(아르오·일명 산악회)는, 혁명주의자일 수는 있을지언정 민주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그들’ 이외의 사람들과는 공존하는 방법도 모르고,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가 (갈등이 있을 때) 대화와 정치로 풀려고 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살육과 폭력을 방지하려는 건데, 이 사람들은 전쟁을 전제하고 상대방을 절멸의 대상으로 봤다. 미숙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북한이 앞선다고 보고, 북한 체제를 기준으로 삼은 건데, 국민들은 북한을 정치적으로 획일화된 사회·경제적으로 낙후한 사회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진보적이지도 않다.” 김종철(이하 김) “한반도 인식이 낙후돼 있다. 전쟁이 난다는 걸 전제했는데, 그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다고 본 거다. 그래서 북한은 책임이 없고, ‘우리’의 방어는 정당하다고 본다. 북한을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자 희생자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왜곡된 대처를 낳았다고 본다. 하지만 전쟁 위기를 탈출할 힘은 북한에 동조해 비밀작전을 수행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아르오 모임 참석자들이 정말 전쟁을 막고자 했다면, 비비탄총을 개량해 뭘 하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앞장서서 탱크 앞에 눕자고 했어야 한다. 죽을 각오로 이 전쟁에 반대한다고 했어야 호소력이 있고 전쟁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통합진보당의 대응에 불만이 있는 것 같다. 박 “상식적으로, 당에 진상조사위를 구성해 신속히 경위를 파악하고, 국민들에게 그 내용을 보고한 뒤 내부적으로 징계할 건 징계하고 (외부적으로) 싸울 건 싸워야 하는 거다. 덮어놓고 ‘허위날조’로 시작해서 ‘농담’으로 끝나는 해괴망측한 궤적은 두고두고 웃기는 일로 남을 거다. 그 당을 찍은 12%의 국민은 저길 왜 찍었나 황망해할 거다. 정치의 정은 일단 거두고 나면 경멸만 남는데, 통합진보당은 경멸받을 만한 궤적을 그려왔다.” 김 “통합진보당 내부에 아르오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실제로 형법상 내란음모죄는 적용이 어려울 것 같은데, 국민들도 이미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고, 자체적으로 교정하고 자정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무조건 ‘농담’이라고 하니, 우리 어머니도 ‘그런 얘길 농담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하더라. 이러니 진보정치의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아닌가.” -이석기 사건이 진보정치 전반에 최악의 위기를 불렀다는 분석이 나오는데. 김 “공감한다. 방송에 나가면 ‘이석기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로 공격하고 다른 것은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거리에서 무상보육 서명을 받고 있으면 ‘종북 세력 아니냐. 내란 세력 아니냐’는 얘기를 듣는다. 더구나 이번 건은, 주체사상을 가진 분들이 자신이 믿는 사상을 위해 활동한 일심회 사건이나 내부 민주주의의 문제였던 통합진보당 경선부정 사건과 달리, 이들이 자칫하면 국민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위험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박 “이석기 사태로 진보정치가 곤란에 처한 게 아니라, 진보정치의 위기 끝에 이석기 사태가 터진 거다. 사실 진보정치의 위기라는 단어는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후부터 회자됐다.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를 이야기하는 진보를 보면서 국민들은 ‘삶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생각했고, 정당득표율 13%로 이어졌다. 하지만 선거 이후 이런 이야기를 꾸준히 이어가지 못하고, 삶을 바꾸는 일은 한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 채 당권 투쟁만 했다. 민주주의를 모르는 세력들은 권력을 탐하면서 부정투표도 감행했다. 앙상한 주체사상밖에 없는 그들을 10년 동안 지켜보고 지지해준 국민들은 고달프다.” -진보정치가 복원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박 “이석기류의 이념형 진보정치와 다른 진보정치가 필요하다면, ‘쟤네는 진보가 아니라 주사파’라고 규정할 게 아니라 다른 진보정치가 뭔지를 보여줘야 한다.” 김 “비슷한 집단은 계속 합쳐나가면서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건 기본 전제다. 비슷한 진보 세력은 합치되, 민주당이나 안철수 의원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정치를 하는 게 맞다.” 김종철 노동당 전 부대표
이석기 사태로 신뢰 잃었지만
진보정치의 독자성 필요해
정당 통합 등 세력화 시기상조
지금은 자정노력 보여줄 때 -그렇다면 2011년 통합진보당엔 왜 합류하지 않았나? 김 “당시 통합진보당은 연립정부에 들어가겠다는 목적을 공유했었다. 그런 노선에 동의할 순 없었다. 협력과 연대는 할 수 있지만, 정부에까지 참여하다면 진보정당은 와해된다. 만약 김대중 정부 때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노동부 장관으로 들어갔다면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졌겠나?” -지금은 노동당이 통합진보당이나 정의당과 합칠 가능성이 있나? 김 “통합진보당은 내부의 문화, 낡고 왜곡된 세계관 때문에 지금 합칠 수가 없다. 정의당은 좀더 진보적으로 선회한다면 몰라도 지금처럼 모호하거나 오른쪽에 있다면 (통합이) 쉽지는 않을 거다.” 박 “그 말대로라면, 노동당과 같이할 정치세력은 없다는 거다.” 김 “어떤 경우에도 통합해선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시간을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는 거다. 지금 다시 합친다면 ‘통합진보당 시즌2’밖에 안 된다.” 박 “단언컨대 독자성으로 진보정치를 보장받는 시기는 끝났다. 진보는 존재 형태로 규정받는 게 아니다. 진보의 정치세력화라는 구호가 시작된 지 30년이 지났다. 그사이 진보정치 세력은 왜 자신의 존재 형태는 재검토하지 않는가?” 김 “재검토했다. 그래서 우리 노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다.” 박 “중앙선관위가 도장 찍어주는 독자성이 진보정치의 독자성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 채 문제제기형 정당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면, (통합으로 생각을) 바꾸는 게 뭐가 두렵나. 옛날엔 우리가 껴봐야 물심부름밖에 못할 때니 그랬지만, 이젠 아니라는 게 2012년을 맞는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당 안에서 내가 진보정당과 같이해야 한다고 말해도 시큰둥하다. 진보정당이 시대적 과제를 담보하거나 정치적 매력을 못 보여주는 거다.” 김 “안철수 의원한테 밀리는 거 보면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못하는 걸 민주노동당으로, 안철수로 표현돼왔다. 우리는 (독자적인) 그 틀을 갖고 있어야만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민주당 내 하나의 분파로 들어가면 우리를 지지하나? 선거연합은 좀더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프레임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집단도 필요하다. 자기 실력으로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대체 뭘 보여줬나. 이제 합치자는 건 너무 우리 중심적인 거다.” 박 “(진보정치를 실현할) 우회로를 설정할 고민을 왜 안 했느냐는 거다. 예전엔 민주당에서 진보정당에 왜 안 들어오냐고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안에서 (진보정치를) 할 거다. 민주당이 시대적 과제를 내걸고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그게 진보라고 본다. 조직 이름에 진보를 붙이고, 조직원들이 ‘내가 진보주의자’라는 모자를 쓰는 것으로 시대적 과제를 실천한 노력을 대신하는 거라면 진보정치가 아니라고 본다. 민주당이라는 남대문에서 하나씩 돌을 쌓고 새로운 누각을 만들어 복지국가라는 현판을 걸 거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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