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을 청구한 5일 오전 서울 동작구 대방동 통합진보당 당사 사무실에 의원·당원들이 어수선하게 오가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초유의 ‘정당해산’ 청구 진보당 강령 뭘 담았기에
통합진보당은 전신인 민주노동당 창당 때부터 강령에서 ‘노동자와 민중 중심 정당’임을 내세웠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를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고 해산을 청구했다.
정부의 이런 법 해석은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정권 등 군부 통치 아래서 억눌린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정치적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려는 고민에서 출범한 진보정당의 가치와 역사성을 무시한 억지 논리라는 비판을 부르고 있다.
진보당은 총 47개항으로 구성된 강령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고…’라고 지향점을 밝히고 있다. 이는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2000년 민노당 창당 강령과 맥락이 같다.
민노당 창당 당시 강령제정위원장이었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5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일하는 사람,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사회가 봉건사회와 다른 근대사회다.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민주사회에서 위상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강령에 담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천영세 전 민노당 대표도 “기성 정치권과 보수정권이 노동자·민중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87년(민주항쟁) 이후 노동자·민중을 존중하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져 민노당이 창당됐고, 강령도 그걸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창당 때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던 강령이다. 박근혜 정부가 이제 와서 내세운 논리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동자·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것은, 진보당과 견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강령에도 들어 있다. 새누리당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존중’, ‘일자리 중심 국정운영’을 내세웠고, 민주당은 ‘서민과 중산층 중심 국민정당’임을 밝히고 있다.
정부는 ‘민중이 사회생활 전반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겠다’란 진보당 강령에서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용한 표현을 도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당 핵심 당직자는 “1970~80년대처럼 ‘민주주의’를 다시 내세우면 낡은 것 같은 고민이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진보적 자유주의란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올해 6월 정책당대회부터 민주주의에 ‘진보적’이란 말을 붙여 공식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숟가락·젓가락을 쓴다고, 우리도 숟가락을 쓰면 위헌이고 종북이냐”고 반박했다. 안 교수는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북한에서 인민민주주의란 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민주주의란 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사실 진보당의 강령을 찬찬히 뜯어보면, 중요한 민주적 가치와 정책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진보당은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 ‘검찰개혁’, ‘계파정치·지역주의 청산’ 등 우리 사회 주요 과제뿐 아니라, 새누리당에서도 주장하는 대선결선투표제, 지방분권 등을 강령에 포함시켰다. 또 재벌의 소유 경영의 독점 해소, 불공정 하도급 거래 근절, 대형 유통점 규제 등 우리 사회 현안들도 강령에 실려 있다. 단계적 무상의료 구현, 노동시간 단축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 복지·노동에 관한 핵심 정책도 강령에 담았다. 특히 진보당이 강령으로 내세운 ‘생애주기별 공적 사회서비스 확대’, ‘보편적 복지사회 실현’은 박근혜 대통령도 차용해 주장한 것이다.
정부는 평화협정 체결, 종속적 한-미 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의 진보당 강령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에 동조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북한에 대한 진보당의 태도에 비판적인 노동당조차 성명을 내어 “주둔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오키나와를 비롯한 전세계의 평화운동가들을 종북주의자로 만들 기세다. 정부는 미군 철수가 오로지 평양의 특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지적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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