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사 상봉자 문의전화 빗발
가족찾기 접수처엔 “생사라도…”
가족찾기 접수처엔 “생사라도…”
이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단의 최고령 상봉자인 강능환(93)씨는 금강산에서 만날 아들의 얼굴을 그려보고 있다. 결혼한 지 4개월 만에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가족과 헤어졌고, 그 뒤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강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아들이 황해도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난해부터 하루가 1년 같았다. 내 나이와 건강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꼭 만나야 한다”며 간절하게 말했다.
남북이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합의한 5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2층 남북교류팀의 전화기는 쉴 새가 없었다. 주로 이번 상봉 대상자들의 문의 전화였다. 준비 사항을 묻는 들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같은 건물 1층 남북이산가족 찾기 접수처를 찾는 이들도 줄을 이었다. “아버지의 생사라도 알았으면 좋겠네요.” 마침 신청서를 내고 돌아서던 노숙현(77)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아버지 노동시(96)씨는 1950년 6·25전쟁 와중에 아내와 6남매를 남쪽에 남기고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노씨는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 전에…”라며 이번 상봉 행사에 참석하는 가족들을 부러워했다.
역시 접수처를 찾은 김광일(85)씨는 앞서 2009년에 신청서를 냈다고 했다. 5년을 기다렸지만 상봉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부터 남북관계가 악화돼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아예 끊어졌다. “이번에 상봉가족 다시 추첨하고 그러는 건 아닌가? 내가 나이를 먹어서….” 김씨는 평안남도 강동군에 살아 있을 것 같은 여동생 병일(78)씨와 남동생 창일(71)씨의 어린 시절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지만, 이젠 걷기도 불편한 상황이다. 남으로 출장을 왔다가 전쟁이 터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가 64년 됐다. “이제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 나한테도 기회가 오겠죠. 그러니까 이번에 꼭 잘돼야 해요.”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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